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던 중 한 채널에서 방송하던 드라마라 보게 되었다.


무려 60부작 드라마인데 마침 SBS에서 무료로 VOD를 공개해서 봤다.


적당히 넘겨가면서 봐서 약 19~20시간 정도 걸려서 다 봤다.


처음 시작은 강남 개발사에 대해 자세히 나올 것처럼 하더니 별건 없었다.


작년에 읽었던 <강남의 탄생>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던 터라 이 드라마도 관심이 갔던 건데 약간 아쉬웠다.


그래도 드라마 자체가 재밌어서 끝까지 봤다.


60부작이다보니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지루한 부분도 많았지만 그럭저럭 볼만했던 드라마다.


60부작이라 남한테 추천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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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드] 쉐프 : 3성급 급식


이거 재밌네 ㅋㅋ


Chef: Mitsuboshi no Kyushoku

(Chef: Three Star School Lunch / Chef~三ツ星の給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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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어하는 영화 연출 :


어떤 무서운 대상(귀신, 유령, 범죄자 등)을 숨어서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던 사람(보통 약한 존재)이 있다. 그런데 무서운 대상의 시선이 갑자기 그 지켜보던 사람을 향하자 다시 숨는다.


숨어서 짧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면 그 무서운 존재는 사라지고 없음. 지켜보던 사람이 어리둥절 하다가 옆이든 뒤를 쳐다보면 갑자기 그 무서운 존재가 떡 하니 나타남. 진짜 너무 뻔하고 지겹게 많이 나오는 장면.


공포감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암튼 난 이런 거 싫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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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보고 느낀 점

* 정식 리뷰는 아니고 보고 느낀 점들 나열한 것.


곡성 봤는데 몰입감이 아주 대단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세세한 메타포들을 다 알지는 못 하겠지만 대충의 의도는 알겠네.


곡성 보고 한 번에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건 아주 당연한 일. 감독이 대놓고 니네 이해하지 말라고 내가 비비 꼬았음ㅋ 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맥거핀도 많고 여러 장르 다 비벼 넣고 개연성 없이 사건 나열함.


기승전결도 없음. 결론 그딴 거 없음. 감독의 의도는 주인공이 겪었던 혼란을 관객들도 느꼈으면 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기독교, 토속신앙, 오컬트 장르 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 영화를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음.


곡성 천만관객용 엔딩 봤는데 진짜 웃기네 ㅋㅋㅋ 딱 전형적인 그런 영화


중간에 좀비씬 나왔던 건 좀 웃겼음. 갑자기 좀비물로 가서 어처구나 없어서 웃음 나옴ㅋㅋ 이 영화는 여러 장르를 버무리다보니 그런듯.


리뷰 찾아보는데 장모 떡밥 보고 소오름. 사람의 생각이란 정말 다양하다는 걸 느낀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냥 떡밥일뿐이라고 봄.


곡성 리뷰 중에 공감 가는 내용은 "이야기 전개가 관객의 예상대로 가면 감독이 택할 수 있는 것은 깜짝 놀래키거나 잔인성에 기대는 것 뿐이다. 이 영화는 예측대로 가지않고 종잡을수 없는 불확실성이 가장 큰 무기다"라는 것.


감독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이 안정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게 주 목적이었다. 나는 그렇게 긴장감을 끝까지 끌고가는 게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생각함. 누구는 하나도 안 무서웠다고 하는데 긴장감과 무서움은 약간 결이 다른듯.


누군가는 무서웠을수도 있고 안 무서웠을수도 있는데 긴장감은 계속 가지고 있도록 만드는 영화라고 본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대단히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시간 30분의 상영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개연성이 별로 없는 것은 감독이 의도한 거라고 봄. 개연성을 일그러뜨리고 그 빈 공간에 관객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는 것.


곡성이 맘에 안 든다는 사람들의 의견을 보면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지 않고 의미 없는 정보가 많다는 것. 무언가 논리적으로 이어져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불만이라고 한다. 이건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인 거 같음. 결과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하지만 때로는 원인 없는 결과도 있을 수 있다는 게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점이 아닐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금융시장이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것도 인간 본성때문인듯. 오히려 결과를 알 수 있는 악재는 악재가 아닐 때도 있음.


<곡성>에서 효진을 연기하는 김환희는 2002년생으로 올해 중2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초딩이 이렇게 연기를 잘하냐고 극찬을 하다가 중학생임을 알고 납득하는 경우를 종종 봄. "그러면 그렇지 역시 중학생은 되니까 이렇게 할 수 있지" 뭐 그런거.


근데 곡성 촬영기간은 2014.08.31 ~ 2015.02.27 로 영화 찍을 당시에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결국 초딩의 엄청난 연기력이었다는 사실.


곡성은 촬영 끝나고 1년 2개월 동안 편집하고 완성된 영화. 언론 시사회 며칠전에야 편집이 끝났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드래곤 사쿠라의 장면들



영화 보다가 느낀 점들 정리


4/18

며칠 전에 영화 접속(97년작)을 보다 여주인공이 포항 바닷가에서 택시 타고 기사에게 서울 가자고 하는 장면 보자마자 든 생각은 '돈이 얼만데 ㄷㄷㄷ'


19년 전에는 채팅으로도 굉장히 진지하게 대화했던 걸까? 그때는 사람들이 PC통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는지 궁금하다.


4/19

오늘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봤다. 1960년작이고 원제는 Plein Soleil. 영화를 보다가 어디서 많이 본듯한 줄거리 같았는데 알고보니 예전에 봤던 영화 <리플리>와 원작이 같은 작품이었다. 정상적으로 꿈을 이룰 방법을 찾지 못한 청춘의 일탈. 일탈이라기보다는 중범죄라 표현하는게 맞겠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 비극적인 결말만이 기다린다.


4/21

예전에 소설 Heart of Darkness 공부할 때 봤던 영화 Apocalypse Now Redux를 어제 다시 봤다. 그때도 재미 없었는데 지금도 재미 없다. 내 취향이랑 안 맞는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전쟁의 광기. 미쳐가는 사람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 상영시간 정리


Title Time
미래소년 코난 646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16
천공의 성 라퓨타 124
이웃집 토토로 88
마녀배달부 키키 103
붉은 돼지 94
모노노케 히메 133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124
하울의 움직이는 성 119
벼랑 위의 포뇨 100

1647


총 27시간 27분


하야오 감독의 작품 몇 개는 제외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만 선정함.


미래소년 코난은 TV방영 애니메이션.

나머지는 전부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다.


내가 미래소년 코난을 2008년에 봤는데 애니메이션 도입부에 '서기 2008년 '이라고 하는 걸 듣고 참 기분이 이상했다. 1978년에 상상했던 2008년은 그런 모습이었던걸까.


4/21 애니 <미래소년 코난>을 8년만에 다시 봤다. 38년 전 작품인데 지금 봐도 재미 있다. 작품 전반에 하야오 감독의 노동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난다. 그를 둘러싸고 좌파적이다, 아나키스트다 등 여러 말이 있지만 이 작품은 그 어떤 것도 아닌 것 같다.


인더스트리아는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견한듯한 모습이고 하이하바는 그냥 시골마을에 대한 동경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중세~근대 사이의 어느 유럽 시골마을이 그의 이상향 같다. 이건 그의 많은 작품의 배경에서도 알 수 있다.



<뷰티인사이드> 감상문


한효주 주연의 뷰티인사이드를 봤다.


이 영화는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일단 느낀 점은


1. 한효주 진짜 예쁘다.


내가 다 본 것은 아니지만 한효주가 나온 작품 중에서는 거의 제일 예쁘게 나온 작품인듯하다.


2. 연완얼


남자 주인공이 한효주랑 만나는 중요한 씬은 다 잘 생긴 배우들이 나온다.


처음 고백할 때는 박서준

파티에 올 때는 이진욱

눈물씬에는 이동욱

마지막 프로포즈 씬은 유연석



결국 연애는 잘생겨야.... ㅠㅠ



영화의 주제는 어찌보면 간단하다.


외면이 아무리 바뀌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사랑은 본질을 찾아가는 것



나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사람과 만나는 것은 큰 행복이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외모나 경제적 측면 등 외부 요인이 사랑의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는데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본질 추구에 대한 이상은 언제나 낭만적이다.


나는 어떨까?


나는 사람의 내면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오직 그것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그렇게 봐줄 사람이 있을까?

과연 둘 다 그렇게 만나는 것이 가능할까?


사실 회의적이다.

나는 별로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대부분 사람들도 그렇다.


외모나 경제 등 외면을 본다.

그게 꼭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들 행복하게 살고싶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행복을 느끼는 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면이든 외면이든 각자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본 로맨스 영화였는데 소재도 재밌었고 배우들도 좋았고 음악도 좋았다.

영화 끝나고 나오는 'True Romance'라는 노래가 정말 좋다. 계속 듣고 있다.


영화 <뷰티인사이드>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독한 미식가 시즌별 방영 시간


Title RT Hours
Kodoku no Gourmet S1 293 4.88
Kodoku no Gourmet S2 417 6.95
Kodoku no Gourmet S3 415 6.92
Kodoku no Gourmet S4 462 7.70
Kodoku no Gourmet S5 400 6.67
Total 1987 33.12

RT = 러닝타임


시즌1 293분

시즌2 417분

시즌3 415분

시즌4 462분

시즌5 400분


총 1987분 ( 33시간 7분 )


(각 시즌은 스페셜 방영분까지 포함한 시간임)


시즌5까지 진행하고 나니까 정말 길다 길어


1시간짜리로 봐도 무려 33회분이네.


어마어마하게 많이도 먹었다 ㅋㅋ






BBC ONE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드라마 리뷰(TV Drama)

Agatha Christie's And Then There Were None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2015.12.26~28

총 3부작 180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세계 최고의 추리 소설 중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영국 추리 소설계의 거장 아가사 크리스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미 영상화가 많이 되었지만

이번에 새롭게 나와서 흥미롭게 보았다.


전반적으로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소설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쉬운 부분은


섬에 숨을만한 공간을 좀 더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 섬에 너무 덩그러니 저택이 놓였다.

소설에서 어땠는지는 읽은지가 오래되어서 잘 기억은 안 난다.


그리고 인디언 인형이 아닌 무슨 조각상 같은 게 나온다.

노래 or 시의 내용도 인디언이 아닌 병정(soldier)이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인디언(Indian)'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바꾼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디언 인형에서 지칭하는 인디언은 미국 원주민을 뜻하는데

그들은 애초부터 인디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날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그래서 병정이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닐까싶다.


그건 그렇다쳐도 이건 뭔가 난해하다. 시상식 트로피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오스카 트로피가 생각난다.


뭔가 더 기괴함을 줄 수 있는 피규어를 사용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범인은 누군지 이미 알기때문에 반전은 없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보았다.


추리소설 역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의 영상화는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소설을 읽었던 사람이든 안 읽었던 사람이든 모두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다.




셜록 유령신부 리뷰

"Sherlock" The Abominable Bride (TV Episode 2016)


★ 스포 있음



BBC one

2016.1.1 방영(한국에서는 1/2 극장 상영)



이번 회는 셜록 시즌3와 시즌4를 잇는 스페셜 방송이다.


영국에서는 TV방영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로 상영한 게 특이하다.


작품에 대한 내 개인적인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재미없다."



처음 절반 정도는 흥미롭게 진행이 되다가


나머지 절반은 완전히 재미 없었다.


처음에는 셜록 본편과는 상관없는 번외편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관련이 있었다.


기존에 셜록TV판을 보지 않고 극장에서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벙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내용을 모르고 보면 중반부터는 대체 무슨 소리하는지 못 알아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관객들 반응을 보면

중간에 보다가 나왔다거나 졸았다거나 하는 게 많고

최악이었다는 평가도 꽤 된다.


유령신부는 셜록팬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의 방송에 가까웠는데

배급사에서 이런 설명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나는 이걸 보기 직전에 셜록 시즌3까지 다 보고 갔음에도

별 재미 없고 지루했다.


그러니 안 보고 갔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싶다.



이걸 보고 나니 시즌4에 대한 기대는 안 하게 된다.


이미 셜록을 두 번째로 보면서 흥미를 많이 잃었었는데

유령신부를 통해 더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도 상당수 팬들은 최고였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3줄 요약 하면


1. 셜록팬이면 볼만하다.

2. 셜록 봤던 사람도 재미 없을 수 있다.

3. 셜록 안 본 사람은 보지 마라.


2016/01/04 - [드라마/영화/예능] - 셜록 리뷰(Sherlock TV Series)





셜록(Sherlock TV Series) 리뷰


BBC 제작

2010~

편당 90분


시즌1 3편

시즌2 3편

시즌3 3+1편(미니 에피소드)

2016 신년 스페셜판(19세기 버전) - 한국에서는 영화로 1월 2일 개봉


시즌4 제작 예정



셜록은 2010년 방영 이후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서 코난 도일의 명작 소설 <셜록 홈즈>를 기본으로 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홈즈의 팬들은 이 작품을 원작의 감성을 잘 살린 드라마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나 역시 셜록홈즈 소설을 다 읽은 사람으로서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정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홈즈가 21세기에 다시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시나리오도 좋았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본 게 2013년 1월로 3년 전인데 정말 재밌었다.


다시 이번에 2015년 12월 30~31일 양일간 시즌3까지 몰아서 다 보았다.


그리고 느낀 점은 또 다르다.


대부분의 내용은 많이 까먹었지만 듬성듬성 기억 나는 것들이 있어 신선함은 떨어졌다.

특히 시즌1 1화에서의 반전이 기억나서 재미가 많이 반감되었다.

시즌2의 침대 장면도 그때는 정말 신선했는데 이미 알고 보니 그저 그랬다.


또한 예전엔 별로 못 느꼈는데 이번에 보니 액션신이 너무 많고, 홈즈의 주변 인물들이 위기에 처하는 일이 많다.


난 순수하게 홈즈가 추리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보고 싶은데

이런 식으로 진행되니 흥미가 떨어졌다.


흔히 '자동차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들 한다.

드라마에도 이 말을 적용할 수 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홈즈도 재미있지만 역시 홈즈의 참맛은 클래식함이다.

19세기 말의 음울한 분위기의 런던, 잉글랜드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들이 주는 맛이 더 좋다.


셜록을 보니 오히려 소설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드라마로는 1984년부터 1995년까지 방영된 그라나다TV의 셜록홈즈 시리즈가 있다.

제레미 브렛 주연 시리즈는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작품이라 고전적인 풍미가 느껴진다.


언젠가 DVD나 블루레이를 사서 전 시리즈를 다 보고 싶다.



다시 BBC 셜록으로 돌아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좋은 작품이다.

홈즈의 팬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수준은 된다고 생각한다.


시즌1~3 중에서는 시즌2가 가장 완성도가 높은 시즌으로 꼽힌다.


시즌3는 상대적으로 달린다는 평가가 많다.

개인적으로도 시즌2가 제일 좋았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19세기 버전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위대한 개츠비(2013) 인상적인 장면들2



닉을 바라보는 개츠비의 미소



이후 친해진 둘은 뉴욕으로 가서 울프심을 만난다.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두 사람.



드디어 도착한 데이지



개츠비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다.



5년 만에 데이지와 마주하게 된 개츠비



깜짝 놀란 데이지



두 사람은 재회의 기쁨을 만끽한다.



궁전같은 개츠비의 저택



개츠비의 해안.



개츠비 저택 내부.



개츠비는 자신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어 데이지에게 던진다.



데이지는 행복해 한다.



세계지도



댄 코디



쿠바 등의 지도. 그와 댄 코디는 캐리비언을 항해했었다.



파티 도중 빠져나와 밀회를 즐기는 두 사람.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톰에 의해 위기에 처하고

교통사고로 완전히 깨지고 만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수영장에서 처음으로 수영을 하는 개츠비.



데이지와 톰은 이스트 에그를 떠난다.



개츠비를 그리워 하는 닉



그는 자신의 꿈을 끝까지 좇았다.


그린 라이트가 마지막으로 비춰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위대한 개츠비(2013) 인상적인 장면들1



그린 라이트(Green Light). 개츠비가 좇는 불빛이다.



닉 캐러웨이의 집



웨스트 에그(West Egg) 해안가의 모습



닉의 옆집에 사는 개츠비



웨스트 에그에서 바라본 이스트 에그(East Egg)



톰 뷰캐넌과 데이지의 집. 톰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중 한 사람이다.



대학 동창인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다.



자신의 트로피를 자랑하는 톰. 그는 육체적 전성기였던 20대 초반을 그리워하고 있다.



데이지 뷰캐넌. 그녀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소녀들의 로망이었다.



골프 선수 조던 베이커. 키가 엄청나게 크다.



데이지를 상징하는 그린 라이트



개츠비의 집



그는 그린라이트를 바라보고 있다.



TJ에클버그 박사.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존재다.

항상 지켜보고 있다.



잿더미 계곡(Valley of Ashes)에 찾아온 톰과 닉.

이곳에는 톰의 정부 머틀이 살고 있다.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광란의 파티를 즐기는 톰과 닉, 그리고 머틀과 그녀의 동생 일행



닉이 받은 개츠비의 파티 초대장.



개츠비의 파티에 몰려오는 사람들



광란의 파티가 이어진다.



화려함의 극치



엄청난 규모의 대저택에서 펼쳐지는 파티



올빼미 안경 아저씨(The Owl-Eyed Man).

그는 개츠비의 서재가 거짓임을 간파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파티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개츠비의 모습.

그의 미소는 모든 사람을 빠져들게 한다.


소설에서 닉이 찬사를 쏟아내는 바로 그 미소.


2016/01/03 - [드라마/영화/예능] - 위대한 개츠비(2013) 인상적인 장면들2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판 리뷰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애니를 보지 않은 사람은 주의할 것. 애니 이후 원작의 내용 언급도 있음)


총 25화


몇 년 전에 대히트를 기록했던 진격의 거인을 봤다.

난 그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에 무심코 TV를 보다가 진격의 거인 광고가 나오길래 한번에 몰아서 다 보았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작가가 우익 성향이다, 작품이 군국주의적 요소 혹은 우익적 요소를 담고 있다.

정도가 있었는데


내가 다 보고 느낀 점은


작가가 무슨 성향인지는 잘 모르겠고

작품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우익 성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작중 인물들이 계속 이야기하는게


"이겨야 한다, 이기면 살 수 있다. 세상은 잔혹하다."


이런 말들이다.


이것은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작중 인물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파적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한다는 내용도 계속 나온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만화다보니 우익적 성향이 확실히 많이 뭍어 나온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거인들은 자본가(부르주아지)

인간들은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같은 구도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더 크게 봐서 지배층 대 피지배층 같은 구도도 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내부를 보면


<진격의 거인>은 처음부터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들을 선보인다.


거인들이 인간이 사는 곳에 쳐들와서 마구 부수고 잡아먹는 광경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이 애니를 보지 않는 게 좋다.


초반에 주인공 에렌(엘런)의 어머니가 죽는 장면은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다.


왠지 이 애니와 작화가 비슷한 <기생수>에서도 그랬었고.


그렇게 가족을 잃은 소년은 군인이 되어 거인들을 다 죽이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지는 흔한 성장 만화같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거인들때문에 수많은 동료를 잃고 엘런 자신도 거인에게 먹히고 만다.


사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인공이 이렇게 빨리 죽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드래곤볼>에서 마인부우의 몸 속에 들어간 베지트같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같은 거인을 때려죽이는 기묘한 거인이 등장하게 되는데

웬만한 독자들은 이 거인이 주인공 엘런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고 난 이후에 나온 여성형 거인.

딱 봐도 이 거인 몸 속에도 인간이 있을 거 같이 생겼다.


이 거인이 아르민을 죽이지 않는 것을 보고

분명 가까운 인물 중에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여자 중에 괴물한테 먹힌 게 엘런 엄마밖에 생각이 안나서

혹시 엘런 엄마인가 하는 생각은 했는데 좀 말은 안되는 거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생각나는 인물도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정체가 밝혀졌을 때는 꽤 충격이었다.


애니메이션은 여성형 거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진압되면서 끝난다.


2016년에 2기를 방영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원작이 많이 진행되었으니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원작 만화의 내용을 보면


알고보니 사실 다 거인이었다.....식으로 진행되는 게 너무 많아서 흥미가 많이 떨어진다.

자꾸 변신물로 변질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만화 보다가 접었다.


암튼 소재 자체는 굉장히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영화『주홍 글씨』 감상문



  영화 『주홍 글씨』는 17세기 말 청교도주의가 가득한 미국 보스턴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남편이 인디언들에게 납치 되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목사 딤즈데일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아이를 갖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남편을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른 죄로 그녀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가슴에 주홍글씨로 'A'를 달도록 한다. 이에 따라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처럼 17세기의 미국에서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당연하게 벌어졌다. 헤스터 프린의 남편은 공식적으로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물론 뒷부분에서 그는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 그런데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눈 것이 잘못된 일로 여겨져서 종교 재판을 당했다. 청교도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러한 ‘마녀 사냥’은 왜 일어난 것일까?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된 것은 제임스 1세의 청교도 억압정책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박해를 피해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하였다. 


 이들은 개인보다는 하나로 뭉쳐진 공동체를 중시했다. 그들의 청교도 사회 마을은 교회의 권한과 회의에 의해 결속되어 있었고 가정은 젠더화된 가부장적인 구조가 강했다. 이런 구조로 인해 여성들은 남편으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획득하기는 어려웠다. 재밌는 것은 이 당시 마녀로 고소되어 처형당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독립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남편이 없거나 남편의 재산에 대한 상속인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고 반항했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렸다. 결국 마녀사냥은 겉으로는 풍기 문란이나 사악한 무리들을 퇴치한다는 명분으로 그녀들을 마녀로 규정했지만, 실상은 경제적 이권을 뺏기기 싫고, 남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는 남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여성이 가지려 한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성들은 오로지 남성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이런 청교도들의 남성 중심의 사고는 교회에서 투표권을 오로지 남성에게만 부여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종교적 권한으로 여성들이 받을 권리를 배제시킴으로서 여성들의 투표권을 박탈하였던 것이다. 17세기 미국은 관습과 법 모두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였다. 영화에서도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한편 17세기 미국 청교도 사회와 우리나라 조선시대는 가부장적 사회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나타난다. 조선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 청춘 과부의 재가를 허용해달라는 요구를 1895년 갑오개혁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청춘 과부의 재가가 허용된다. 미국 사회도 20세기에 접어들며 여성들의 권익 향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다. 


영화 『주홍 글씨』는 억압 받던 여성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는데, 이후 역사는 여성들이 억압에서 점차 벗어나는 모습이었다. 헤스터 프린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2014년 4월 14일 작성


 



『인터 걸』 감상문



  영화 『인터 걸』은 1980년 후반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타냐는 홀어머니와 함께 레닌그라드에 살면서 낮에는 간호사로 근무하고, 밤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이중생활을 영위 한다. 그러던 중 스웨덴 남자 에드의 진실한 사랑으로 청혼을 받고, 해외이주와 풍요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그와 결혼해 스웨덴으로 갈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추천서가 없다는 이유로 출국이 저지당하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에드는 홀로 스웨덴으로 떠난다. 


타냐는 하는 수 없이 엄마와 자기를 버린 아버지에게 추천서를 받으러 간다. 20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추천서의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타냐는 다시 매춘을 하게 된다. 돈을 모아 어렵게 스웨덴에 온 타냐는 에드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소련 이주민이 갖는 사회적 소외감과 남편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결국 타냐는 고향으로 보낸 돈 때문에 같은 매춘부였던 친구가 달러 암거래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결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전까지 사회주의 국가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에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당시 이 지역으로 여행이나 유학, 이민을 간 사람도 거의 없었고, 매체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80년대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주로 맑스의 책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통해서 이들을 접했지 실제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서로가 완전히 단절 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영화 속에서도 주인공 타냐는 사회주의 밖의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 외국인들을 만나게 되면서 점점 바깥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된다. 언제나 궁핍하고 어려운 생활, 배급제에 따라 물건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나라의 국민인 자신과 달리 외국인들은 풍족한 물자와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소련의 국민들은 열심히 일하든 아무것도 안하든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노동 의욕이 떨어졌다. 


겉으로는 누구나 평등한 아름다운 세상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의 간부와 정부 고위 관료들은 풍족한 삶을 누렸고, 대부분의 인민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소수를 제외하면 누구나 평등하게 가난한 삶을 살았던 것을 과연 좋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영화에서도 타냐의 아버지는 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정부에서 주는 돈에 기대는 삶을 살았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한다. 이 개혁정책은 소련의 정치 개혁, 긴장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며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 냈다. 또한 언론의 자유와 비판이 허용되고, 인권이 크게 개선되었으며, 통제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시도되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영화 속의 타냐처럼 당시 소련은 이미 외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민들의 열망이 강해서 그러한 정책들이 없었더라도 결국 사회주의 체제는 무너졌을 것이다. 


현대의 세계에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풍요로운 세상을 찾아 조국을 떠났던 타냐는 당시 소련의 암울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2014년 6월 10일 작성


 



『세일즈맨의 죽음』 감상문



  영화 『세일즈맨의 죽음』의 원작인 아서 밀러의 희곡은 1930년대의 미국사회를 그리고 있고, 영화는 1950년대를 나타내고 있지만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인상적이다. 영화 『세일즈맨의 죽음』은 평생 동안 영업사원으로 근무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윌리는 30년 이상 한 회사에서 일하고 이제 환갑의 나이가 되었지만 기댈 곳이라곤 부인과 두 아들 비프와 해피뿐이다. 


그러나 그는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큰 아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도 가지지 못한 채 방황하고, 동생은 과시와 사치에 빠지며 가정은 붕괴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윌리가 자식교육은 제대로 하지 않고 너무 큰 기대를 걸기만 하여 아들들이 엇나가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윌리가 내연녀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아들 비프가 목격하며 부자 간의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영화 후반부에서 아들 비프는 아버지 윌리에게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외친다. 비프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나 숨이 막혔던 것이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윌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아들에게 돈이라도 남겨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자살을 하게 되며 극은 막을 내린다.


  이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의 현상과 문제점을 드러내고 산업 사회의 비정함을 폭로한 사회극으로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미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아메리칸 드림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주인공 윌리는 1950년대 미국의 평범한 샐러리맨의 표상이다. 나라경제는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그의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백인 중산층에게는 안정과 번영의 시대가 열렸다. 중산층들의 소비 수요 증가로 미국 경제는 번영의 추진력을 얻었다. 영화의 주인공 윌리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 대열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직장에서는 해고되고 가정은 엉망진창이다. 당시 미국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윌리 가족이 돈이 많았다면, 윌리가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더 높은 봉급을 받았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윌리의 아들도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의 능력이 있었다면 아버지와의 사이도 조금은 나아졌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마음먹은 대로만, 좋은 쪽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누구나 다 잘 살 수는 없는 게 세상이다.


  한편 영화에서 윌리는 딱 한 명 소중한 친구인 찰리가 있다. 찰리는 그에게 자신의 회사에 들어와 일하라고 하지만 윌리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 제안을 거절한다. 현대사회는 점점 사람들을 외롭게 만든다. 도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사람들과 단절된다. 우리나라는 2013년 한 해에만 1717명이 고독사로 사망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쓸쓸하게 혼자서 죽은 것이다. 이것처럼 윌리도 결국 가족, 친구들과의 정서적 단절로 인해 찾아온 쓸쓸함으로 자살을 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세일즈맨의 죽음』은 1950년대를 이야기하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에 대입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우리 주위에 윌리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아버지들이 참 많기 때문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런 외로운 사람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2014년 6월 5일 작성


 




『모던 타임즈』 감상문



  영화 『모던 타임즈』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의 미국 사회를 다룬 작품이다. 미국은 20세기 초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에 의한 혁명적인 생산성 향상을 이루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공산품의 가격은 대폭 하락하며 중산층들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차 대전 승리 후 호황이 계속되었고, 이후 경기상승을 지탱한 과잉자본이 주식투기로 이어졌다. 


주식투기로 주식시장은 엄청난 상승세를 이어갔지만, 1929년 10월 결국 거품이 빠지며 대폭락하게 된다. 대공황이 찾아오며 지금까지 생산했던 제품들을 구매할 소비자층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제품을 팔지 못한 기업들은 도산에 내몰렸고, 기업의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었다.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자 소득 감소로 소비를 줄였는데 이는 기업의 매출 감소로 이어지며 경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역설했던 세이의 법칙이 무너진 것이다. 


 이렇게 경제는 혼자서 호황과 불황을 오갔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언제나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산업혁명 초기의 어려운 환경을 지나 기계가 본격적으로 현장에 투입되면서 인간은 기계의 보조원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철저하게 분업화된 작업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고, 창의성은 말살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단순 반복 노동만 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도 찰리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볼트 조이는 일만 계속하다 정신병에 걸리게 된다. 무엇이든 다 조이려고 하는 로봇이 된 것이다. 또 공장의 사장은 노동자들이 정해진 시간 동안 최대한의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밥 먹는 시간조차 아끼려 한다. 그 방법으로 사장은 자동 식사 기계를 도입하려 했지만 기계의 결함으로 실패한다. 


찰리가 기계로 밥을 먹는 장면은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친다. 이미 자본가의 입장에선 노동자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로봇이나 가축으로 여겨진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1930년대의 인간성을 상실한 노동자의 모습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대공황 시기의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끼니조차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에 나온다. 한 소녀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빵을 훔치다 경찰에 잡히고, 한 무리의 남자들은 백화점에 무단 침입하여 음식을 먹는다. 이미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부국으로 손꼽히던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결국 좀 더 많은 사람이 좀 더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경제가 일반 대중이 아닌 소수를 위한 경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도 소수의 투기세력에 의해 주식시장에 거품이 형성되었다 빠지며 대공황을 맞이했고, 공황의 피해는 대부분 평범한 서민들이 보았다. 영화 속의 소녀도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카바레에 취직하며 직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찰리는 영화의 끝에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잘 해낼 수 있다고. 


그의 말처럼 미국의 경제는 다시 살아났고, 노동자들의 삶도 점차 개선되었다. 일반 민중들의 인간다운 삶을 꿈 꿨던 그의 이상은 어느 정도 실현된 것 같다.


2014년 5월 22일 작성


 



『제르미날』 감상문



  영화 『제르미날』은 1885년 출판된 에밀 졸라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19세기 중후반 산업혁명 시기의 프랑스 탄광촌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 수준 높은 탄광 노동소설이다. 우리는 흔히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영국을 떠올리는데, 프랑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이 당시의 프랑스는 제2제정 시기로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던 기간이었다. 프랑스 제2제국은 대내적으로 공업과 농업발전을 촉진시켰고 대규모 기술개발과 건설 사업을 벌였다.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의 삶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대외 팽창의 야욕으로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았고, 내부에서는 국민들의 불만을 통제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한다는 구실로 자유를 억압하였다. 일부 부르주아들은 자본을 축적하며 더 부유해졌지만 민중들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이는 영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광산의 사장과 임원 가족들은 호화로운 식사를 즐기며 더 많은 이윤을 갈구한다. 반면 광산의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근무하며 제대로 쉬지도 못 하고 정당한 임금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자본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에 급급한 실정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티엔은 광산의 열악한 상황과 광부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파업을 결심하게 된다. 프랑스는 이미 혁명을 경험한 나라였다. 또한 유럽에서 1848년 맑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여 사회주의나 노동운동에 대한 사상적 토대도 존재했다. 


영화에서도 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공산주의 세력에 선동 당했다고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사장은 자기도 버는 거 없이 마치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며 노동자들을 다시 일터로 보내려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말에 굴복하지 않고 파업을 계속해 나갔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려는 순수한 열정이 파업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사측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리고 군대를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벨기에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온다. 이것은 100년도 더 된 서양에서 쓰인 소설이지만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얼마 전 있었던 코레일 파업 사태에서 사측이 노조 측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대체 인력을 뽑아서 운영을 하려고 했었다. 또한 많은 회사에서 높은 임금을 주어야 하는 내국인 노동자 대신,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저임금을 유지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화에서는 결국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포기하고 사측에 굴복하게 된다. 내 아이에게 빵 한 쪽이라도 먹이려면 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에티엔은 같이 파업 했던 노동자들에게 파업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서 비난을 받는다. 이후 광산 폭발 사고가 벌어지고 에티엔은 지옥 같던 광산을 떠나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에티엔은 떠나면서 노동자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보기에 노동자들의 삶은 극적으로 향상되었다. 결국 그들 한 명 한 명이 흘린 피와 땀이 있었기에 지금의 노동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2014년 5월 18일 작성


 



『아미스타드』 감상문



  영화 『아미스타드』는 1839년 쿠바 아바나에서 푸에르토 프린시페로 이동하던 노예 수송선 아미스타드 호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점거농성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53명의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싣고 떠난 아미스타드 호는, 노예 중 한 명인 조셉 싱게가 주도한 봉기로 인해 흑인 노예들이 점령하게 되었다. 선장, 선원, 요리사 등을 살해한 이들은 남은 백인 선원들에게 배를 아프리카로 돌리라고 하였으나 선원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몰래 미국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렇게 미국으로 향하던 아미스타드 호는 미국 해군의 전함 워싱턴 호에 나포되면서 이들을 둘러싼 기나긴 재판이 시작된다. 


재판은 이 흑인 노예들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가리기 위해 실시되었다. 해군 장교, 쿠바 상인, 스페인의 이사벨 2세 여왕은 저마다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이어진 재판에서 이들은 합법적인 노예가 아니라 납치된 상황임이 인정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또한 폭력을 사용한 것도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았다.


 이는 일견 노예 해방을 위한 미국 사회의 노력의 성과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노예가 되는 과정에서의 불법이 발견 되어 노예가 되지 않은 것일 뿐 노예제 폐지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전부터 선장 소유의 개인 노예였던 한 명에 대해서는 선장의 소유권이 인정되어 선장의 상속인이 소유권을 넘겨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이 당시 미국은 노예제가 남아 있는 지역과 폐지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미국의 북부 지역은 1787년 북서부 조례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했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노예제가 여전히 횡행했다. 


북부에서 노예제를 폐지하게 된 것은 북부 사람들이 인도주의자들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는 값싼 흑인 노예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남부는 아직 농업 중심의 경제로 노예제를 통해 얻는 이득이 더 컸기 때문에 노예제가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 『아미스타드』에서는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 힘쓰는 백인들 덕분에 흑인 노예들이 자유의 몸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굉장히 모순적이다.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와서 노예로 만든 것은 바로 백인들이다. 자신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어서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가축이나 물건처럼 대우했다. 


그랬던 그들이 마치 큰 아량을 베풀듯이 흑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애초에 흑인들은 노예도 귀족도 아닌, 그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이었다. 백인들이 멋대로 노예로 만들고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병 주고 약주는 식의 행동이다.


 미국은 그들의 독립 선언문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노예제는 얼토당토않은 것이고, 결국 흑인들을 그들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들은 자유롭고 독립할 권리가 있지만 흑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국 영화 『아미스타드』는 ‘백인에 의한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이야기 구조를 충실히 따른 작품으로, 백인 우월적 시각에서 제작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014년 5월 2일 작성


 



『스파르타쿠스』 감상문



 영화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73년에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카푸아에서 일어난 노예반란을 이끌었던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노천광산에서 일하는 노예였다. 그는 동료를 괴롭히는 경비병에 반항하다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우연히 검투사감을 찾던 상인에게 발탁되어 검투사 양성소로 가게 된다.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교관을 죽이고 다른 노예들을 지휘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지만 결국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진압을 당하며 모두 처형을 당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동양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스파르타쿠스를 보며 대부분 진승, 오광의 난을 떠올린다. 진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그들의 반란과 스파르타쿠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두 사건의 차이점은 스파르타쿠스의 난으로 로마가 멸망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 사건에 대해서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도 그의 책에서 특별히 중요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실패했고 로마는 건재했을 지라도 비인간적인 억압과 정치적 압제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그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공산당 선언, 자본론 등의 책을 저술한 맑스가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해 독일의 공산당 무장혁명조직이 이름을 ‘스파르타쿠스단’으로 지어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를 보며 떠오르는 또 하나의 사건은 고려시대에 무신집권기에 발생한 ‘만적의 난’이다. 고대부터 철저한 신분제 사회가 계속되다가 무신 정변 이후로 접어들면서 문무의 지위가 바뀌기도 하는 등 신분 질서에 많은 변동이 있었다. 만적의 난은 이러한 시기에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며 다른 노비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계획했지만 같은 노비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간 사건이다.


 스파르타쿠스, 진승과 오광, 만적 등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야말로 사회 최하층 계급이라 할 수 있는 노예계급에서 반란, 혹은 신분 해방 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21세기에도 근대 이전의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나라도 아직도 ‘시민’이 아닌 ‘백성’의 관념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볼 때면 그들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인지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어쩌면 그들은 고대의 스티브 잡스가 아닌가 싶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 누가 이런 스마트폰 시대를 상상이나 했을까. 아이폰이 없었다면 삼성의 갤럭시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유를 위해 봉기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패했지만 패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3월 13일 작성


 



7번방의 선물 감상문



 7번방의 선물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과유불급’이다. 영화 전반에서 감정의 과잉이 느껴진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감동을 강요하고 있다. 지적장애를 가진 사형수, 그의 어린 딸, 그리고 억울한 누명. 어디서 많이 보던 설정 아닌가? 이러한 장치들을 가지고 영화는 관객들의 눈물을 빼놓기로 작정하고 들어간다. 또한 감독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이 보인다. 그건 좋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세련되지 못하고 촌스럽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먼저 최지영 양이 죽게 되는 과정부터 그렇다. 경찰청장의 딸이라는 설정, 세일러문 가방, 주차장에서의 만남,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을 가다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죽는다. 개연성 없이 너무 황당한 설정이다. 차라리 정말로 경찰청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다른 진범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둘째로 용구의 딸 ‘예승’이 교도소에 들어오는 상황도 너무 억지스럽다.


 어차피 영화라는 게 허구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엉성하게 진행되었다. 세 번째는 한 재소자의 방화로 인해 교도소에 화재가 나서 보안과장을 용구가 구출하는 장면이다. 그 사건 이후 보안과장은 용구에게 호감을 갖고 용구를 돕게 된다.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집어넣은 설정이지만 그 전환이 너무 급격하여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네 번째는 끝부분의 열기구를 타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영화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재소자들이 힘을 합쳐 탄원서를 동시다발적으로 보낸다든지, 재소자들의 인맥을 동원하여 언론에 알린다든지 하는 등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움직임을 보이는 게 맞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외박을 나가서 탈출을 시도하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열기구라니. 감독이 도대체 관객의 수준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이런 장면을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은 ‘예승’의 독백과 ‘용구’의 사형 날 장면이다. 예승의 독백은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세일러문과 어떻게든 연계를 시켜보려는 감독의 의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여 사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구의 사형 날 장면은 마치 예승이가 “여러분 이제 울 시간 이예요. 하나, 둘, 셋!”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분명 울어야 되는 시점이긴 한데 영화 전반에 걸쳐 감정의 과잉이 느껴지다 보니 울기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설정들은 ‘감동’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너무 과도하게 쓰였다. 영화 진행에서 가장 질 낮은 구성이 우연성의 반복으로 인한 사건의 발생을 책임 없이 던져놓는 것인데 이 영화가 그렇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과잉의 연속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이렇게 감동적으로 만들었으니 당신들은 감동받아야 한다고 감독이 말하는 듯 했다. 하지만 강요된 감동은 불편하다. 나는 분명 감동을 받았지만 그게 진정한 감동은 아니었다. 


 이렇게 비판할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7번방의 선물’은 분명 재미는 있었다. 배우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러운 연기가 감정과잉의 덫에 빠진 영화를 살렸다. 또한 사랑스러운 ‘예승’이가 있었기에 그래도 웃으면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7번방의 선물’은 비록 엉성하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그래서 제 점수는요 10점 만점에 6점입니다.


2013년 5월 1일 작성


 



연극『The Pride』(프라이드) 감상문


 연극 『The Pride』는 영국의 배우 출신 작가 알렉시 캠벨(Alexi Kaye Campbell)의 데뷔작으로 2008년 영국 내셔널 씨어터(National Theatre) 초연, 소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뛰어난 작품성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비평가 협회, 존 위팅 어워드,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등 공신력 있는 시상식을 휩쓸었다. 2010년에는 뉴욕 MCC 씨어터로 진출, <위키드>의 조 만텔로가 연출을 맡고 영화 <향수>의 벤 위쇼, <한니발>의 휴 댄시 등이 출연하며 대중적인 사랑까지 얻었다. 


이렇게 영국과 미국에서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인정받은 작품인 『The Pride』가 2014년 한국에서도 드디어 공연을 해서 보러 가게 되었다. 연극은 1958년과 2008년(한국 공연에서는 2014년)을 오가며 진행되는, 두 시대의 각각 다른 필립, 올리버, 실비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58년의 필립과 실비아는 부부, 그리고 올리버는 동화 일러스트레이터인 실비아의 동료 작가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부동산 중개업을 하며 현실에 안주할 수밖에 없었던 필립, 세상을 돌아다니며 예술적 감성을 키우는 자유롭고 섬세한 올리버, 배우의 길을 접고 일러스트레이터로의 새로운 삶을 꾸리지만 어딘가 잘 풀리지 않는 결혼생활에 외로움을 느끼는 실비아. 세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한 저녁 식사에서 필립과 올리버는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고, 팽팽한 그 분위기 속에 실비아는 둘 사이에 뭔가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후 필립과 올리버는 실비아 몰래 만남을 갖게 된다. 하지만 필립은 둘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올리버에게 이별 통보를 한다. 이에 올리버는 필립에게 간곡하게 매달리며 다시 생각해달라고 애원하지만 1958년의 시대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었다. 결국 실비아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둘 사이를 인정하며 파국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 


 한편, 2014년의 필립과 올리버는 1958년의 그들과 달리 굉장히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이다. 1958년에 동성애는 치료의 대상이었다. 필립은 올리버를 잊기 위해 병원을 찾아 갔었다. 의사는 동성애를 병리적인 현상으로 규정하고 필립을 섹스에 미친 환자정도로만 취급한다. 필립은 정신적인 사랑을 더 중시하고 이야기하려 하지만 의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필립을 오로지 육체적 쾌락에만 몰두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당시는 치료방식도 굉장히 폭력적이었다. 필립을 병실에 가둬놓고 남성의 음란한 사진을 보게 한 다음 구토를 유발하는 주사를 놓는다. 


이후에는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한다. 이러한 치료과정을 통해 동성 성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4년에는 동성애로 치료를 받지 않는다. 아직 시선이 그리 곱진 않지만 동성애를 ‘틀리다’의 관점이 아닌 ‘다르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예로 2014년의 실비아는 필립이 아닌 마리오라는 이탈리안 남자친구와 사귀면서 필립과 올리버의 절친한 친구로 나온다. 실비아는 동성애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오히려 둘 사이를 다시 이어주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2014년의 필립과 올리버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며 위기를 맞게 되지만 결국 극복하여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 


 연극 『The Pride』는 동성애를 소재로 한 파격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의 이목을 끌었다. 동성애에 대해 별로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했다. 작품을 보러 가서 처음에 느낀 것은 여성 관객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가졌던 생각이지만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게이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어느 정도 입증된 것 같았다. 여자들은 드라마, 영화, 만화 등에 출연하는 남자 캐릭터들을 커플로 만들어서 노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한 사례로 예전에 『하얀거탑』이라는 굉장히 남성적인 드라마가 있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사랑에 대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팬사이트에서는 남자 캐릭터를 게이화(化) 하여 커플로 만든 소설이나 이미지 등이 자주 올라 왔다. 이 드라마를 즐겨보던 나로서는 같은 작품을 보고서도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다는 점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었다. 그 밖에 남자 아이돌 그룹의 게이 만들기도 굉장히 흔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작품에서도 배우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게이인 친구’를 갖는 것을 뭔가 쿨 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꽤 있다. 


 한편 이와 반대로 레즈비언에 대해서는 남자든 여자든 별로 관심이 없다. 이것은 우리 일상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남자 2명이 손잡고 거리를 걸어가면 다들 쳐다보고 수군거리지만, 여자 2명이 손잡고 걸어가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대부분 레즈비언보다는 게이를 다룬 작품이 더 많다.


 그리고 우리는 남자끼리의 동성애는 어딘가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여자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감정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조롱을 당하는 것도 대부분 게이들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진정한 사랑은 남성과 여성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과 남성의 사랑이라고까지 말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남성과 남성의 사랑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주 먼 옛날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바로 성기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삽입’이 가능한 성기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여성은 실질적으로 여성끼리 성관계를 가질 수 없지만 남성은 입과 항문을 통한 성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인식이 차이가 난다고 본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물론 ‘플라토닉 러브’같은 정신적 사랑도 있지만 결국은 육체적 사랑이 뒷받침 되어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성은 사실상 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남자는 육체적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레즈비언보다 게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더럽다는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닐까? 


 한편 작품은 가끔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굉장히 진지하게 진행된다. 주인공 남자배우들은 키스신까지 하며 열연을 펼친다. 남자끼리의 사랑이라는 것이 굉장히 낯설긴 했지만 배우들의 열연으로 어느 정도 몰입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큰 불편한 감정 없이 극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생각이 우호적인 쪽에 가깝기에 그랬을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 사회는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강한 편이다. 


『The Pride』의 배경인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분위기라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이라기보다는 ‘혐오’ 쪽에 가깝다고 본다. 특히 연령층이 높고 남성일수록 이런 경향이 더 심한 것 같다. 그분들이 생각하기에 동성애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정상적 행태인 것이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 측에서는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하며 증오한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동성을 좋아하건, 이성을 좋아하건 그건 각 개인의 자유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좋아하고 말고는 국가나 사회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집안의 반대 같은 거야 이성 간의 사랑에도 비일비재한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고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동성애 문제는 굉장히 논쟁거리가 많아서 여기서 그런 내용을 다 쓸 수는 없지만, 개인의 문제를 사회가 너무 간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한 편의 연극 관람을 통해 ‘동성애’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동성애자에게 딱히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뭔가 생각이 크게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인생을 훌륭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 생애를 통해 그 삶으로 인도해주는 원리, 즉 삶을 그렇게 훌륭하게 만들어줄 원리는 가족이나 명예, 재산도 아닌 바로 ‘사랑’이라고 하였다. 


그 사랑의 대상이 설령 이성이 아닌 동성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대상보다는 사랑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연극 『The Pride』가 말하고자 했던 바도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 다른 것일 뿐, 결국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2014년 9월 10일 작성


 



응답하라 1988 6화 최택 우승은 실제 이야기


최택과 대결하는 기사들의 이름은 실제로 있는 기사들이다.

 뤄시허, 장쉬, 왕레이, 왕밍완, 왕시


왜냐하면 이 이야기가 실제 이창호9단의 전설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기사


http://news.joins.com/article/453800





이창호 9단은 2005년 농심배 국가대항전에서 파죽의 5연승으로 한국에 우승컵을 선사했다.




실제 대국기록.


아래는 6화 초반부에 대회 최종라운드 하러 가는 장면




최택은 홀로 남아 있다.




이것은 바로 이창호 9단과 당시 중국 기사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디테일이 살아있네




실제 대국장 모습과 드라마 비교



사진 출처 : www.leechangho.com



응답하라 1988 6화 중 최택 대국 장면 



우리증권배 최종 라운드 제2국


최택이 흑번이다.


계가를 해보니 백이 55집 정도

흑이 64집 정도


흑이 반면 9집 가량 이기고 있고

백이 둘 차례라도 승패가 뒤집어질 차이는 아니다.

덤이 5집 반이라고 가정하면

1집반 정도는 흑이 이긴 대국


아래는 실제 기보



당시 기사

(출처 : http://www.leechangho.com/story/sview.asp?gubun=P007&seq=10300&pagec=8)



대국중인 모습



참 잘생겼네. 안경도 잘 고른듯








돌 놓는 장면은 풀샷으로는 잘 안 나온다. 

바둑돌 놓는 게 쉬워보여도 초심자에게는 의외로 어려운 거라 연기자도 어느 정도는 연습했을 것 같다.



최종국 장면. 최택 vs 왕시 

최택의 흑번. 

옆에서 찍어서 판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계가를 해보면 


백이 사석 제외하고 75집 정도 흑이 91집 정도

사석은 백이 8개 정도 추정, 흑이 3개 정도 추정


반면으로 흑이 11집 가량 앞서고 있다.


그리고 지금 백이 두는 차례지만 이미 큰 끝내기는 다 끝난 상황이기 때문에

덤을 제하고도 흑이 3집반은 무난히 이길 대국이다.


아래는 당시 대국의 실제 기보





대국이 종료되면 다들 이렇게 빙 둘러 모여서 복기를 한다.



결국 최종국 승리로 한국의 우승을 이끈 최택 6단



기적같은 대역전승을 이뤄냈다.




연일 이어진 대국으로 완전히 지친 최택



영화 보러 가고싶은 택이



이창호 9단을 모델로 만든 인물이 최택


응팔 6화는 농심배 이야기를 가져다 쓴 회였다.


 




브이 포 벤데타(2006) 리뷰


V for Vendetta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이 글에선 작품의 몇몇 장면들을 살펴보고 

느낀 점에 대해 쓰려한다.

(끝에 결말이 있으니 영화를 안 본 사람은 본 다음에 읽는 게 좋다.)



영화 초반부 브이(V)의 등장 장면



이비 해몬드(내털리 포트먼:Natalie Portman)



조금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



가면에 가린 얼굴이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다.



무언가 유머러스한 브이



영국의 독재자 애덤 서틀러



그는 항상 화면으로 지시를 내린다.



BTN 방송국을 점거하고 자신의 영상을 틀게 한 브이.



그는 국가(정부)에 대한 비판을 한다.



과연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브이의 집으로 오게 된 이비. 그녀는 이 상황이 싫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이내 체념하고 브이의 집에서 머무르기로 한 이비.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브이. 토스트인데 달걀?이 들어가 있다. 버터도 발랐다. 엄청 맛있어 보이네.



혼자 검술을 연마하는 브이. 마치 중세의 기사같다.



우여곡절 끝에 고든의 집에 오게 된 이비. 고든은 브이와 똑같은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고든의 집에서 잔 이비.



같이 아침식사를 한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의사당 폭파를 위한 폭탄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비는 브이의 뜻을 이어받고자 한다.



한편 11월 5일 가이 포크스를 기념하는 날에 영국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을 진압하려 하지만 명령을 내릴 상부는 이제 없다.



결국 시민들은 저지선을 넘는다.



엄청난 기세. 이 장면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시민들의 저항.



결국 의사당 폭파를 위해 열차는 출발한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지켜보는 시민들.



브이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의사당이 폭파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1605년 11월 5일 영국 의사당 건물 폭파 계획을 세웠던 가이 포크스는 

오늘날 전세계에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시민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선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전체주의 국가화된 영국을 그리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런 나라들이 몇 군데 있고 우리나라도 군사독재시절을 겪었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역사 속에서 독재자는 끊임없이 출현하여 인류를 괴롭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그에 저항하며 발전해왔다.


아무리 밟으려 해도 밟아지지 않는 민초들의 저항.

그것만이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 비록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질지라도

역사 전체의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우리는 계속 전진하고 있다.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자.


 



몬테 크리스토 백작(2002) 리뷰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내용은 유명하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인상적인 장면들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이 글에는 결말이 있으니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영화를 먼저 보고 이 글을 읽는 것이 좋다.)



에드몽 단테스의 연인 메르세데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체스 말 중 하나인 폰(Pawn)



몬데고는 끌려가는 단테스에게 폰을 건넨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등장한다.



지옥같은 감옥에 끌려 온 에드몽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신부 파리아



감옥을 탈출한 단테스는 보물섬으로 향한다.






기암절벽이 인상적인 섬이다.



그가 전해준 보물지도를 통해 보물을 찾으러 온 단테스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무언가 발견



상자가 보인다.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보물상자들. 아직도 더 남아 있지만 배가 작아서 싣지 못했다.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로 일약 최대의 거부로 떠오른 단테스



이 금화로 그는 대저택을 구입한다.



단테스의 저택. 아니 이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저택.



애드벌룬을 타고 내려오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



금의환향이랄까. 아니 그보다 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단테스의 등장.

죄인이 되어 평생을 감옥에서 살게 된 신세에서 최고의 갑부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메르세데스는 그의 버릇을 발견하고 백작이 아닌 단테스임을 알아차린다.



단테스는 부인해보지만 결국 인정하게 된다.



아직까지 단테스를 잊지 못하고 있던 그녀와 극적으로 화해하는 단테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후 영화는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운송물을 빼돌렸던 몬데고는 짐을 확인하러 오지만 상자 안에 들은 것은 체스 말 '폰'뿐이다. 단테스가 돌아왔음을 알린 것이다.



이제 최후의 결투만이 남았다.



두 사람의 운명은 결국 누군가 한 명이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이었다.



단테스



몬데고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결투 장면






결국 승부는 끝이 났다.



예전에 자신이 갇혀있었던 감옥섬을 사들인 단테스




이제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다.



신은 없다고 말하던 단테스지만,

그는 그럼에도 끝까지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면서 느낀 점은 <위대한 개츠비>와 설정 상 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별 볼일 없던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부자집 남자에게 빼앗기고 

나중에 엄청난 돈을 모아서 대저택을 구입하고 파티를 열어서 옛 연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설정.


이야기 자체는 완전 다른 내용이지만 그런 설정은 닮은 점이 있다.


원작 소설이 1844년에 나왔고

위대한 개츠비는 1925년에 나왔으니 


굳이 둘 중에서 원조를 따지면 알렉산드르 뒤마가 원조라고 할 순 있겠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는 사실 흔한 것 같다.


아무튼 그것보다는 정말 바닥 끝까지 떨어졌던 주인공이 극적으로 복수에 성공한다는 내용은 

독자로 하여금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아서 소설의 내용은 모르지만


영화 상으론 굉장한 통쾌함을 준다.


복수에 관련된 수많은 작품들의 결말은 복수에 성공한 사람도 슬프게 산다는 내용으로 끝나는 것도 많다.

악당과 같이 죽거나, 복수는 결국 덧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식으로 끝난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작품보다는 통쾌하게 다 무찌르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을 좋아한다.

어차피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들인데 허구 속에서라도 대리만족하고 싶은 심리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보면서 떠오르는 한 가지 질문은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다.


에드몽 단테스는 복수를 위해 살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누군가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있겠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난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고 있다.


삶의 목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도 해봤지만 결론은 안 났다.


현재는 그저 하루하루 나의 시간들을 재미있고 즐겁게 채우는 것에 만족한다.


궁극적 목적은 없다.


앞으로 더 생각을 해봐야할 문제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언급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1934) 명대사



"It is not my sword, Mondego, but you past that disarmed you."


"너를 쓰러뜨린 것은 나의 검이 아니라 너의 과거다 몬데고."


2002년작에서는 이 대사가 없다.


대신 마지막 장면의 대사.


몬데고 "What happened to your mercy?"


"너의 관용은 어떻게 된 거지?"


단테스 "I'm a count, not a saint."


"난 백작이지, 성자가 아니야."



이 대사는 이전에 나왔던 대사를 알아야 한다.


Abbe Faria "I'm a priest, not a saint."


아베 파리아 "난 신부지, 성인이 아니야."


감옥에서 만났던 신부가 했던 이야기를 변형한 것이다.


암튼 영화는 전반적으로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V for Vendetta 브이 포 벤데타 명대사



“People shouldn't be afraid of their government. Governments should be afraid of their people.” 


사람(국민)들은 그들의 정부를 두려워 해서는 안 돼. 정부가 그들의 국민을 두려워 해야하지.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 청춘에 대해 생각하다.


방송 다시보기 : http://www.kbs.co.kr/drama/dramaspecial/view/vod/index.html?searchStatus=0&articleIndex=1&vosample=&currentUrl=http://www.kbs.co.kr/drama/dramaspecial/view/vod/index.html



노량진역에 기차가 서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일단 가장 먼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KTX나 무궁화, 새마을 기차는 노량진역에 정차하지 않는다.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노량진을 지나 영등포역에 선다.


다음은 감독과 작가의 작품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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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PD는 “노량진은 시험 준비를 하는, 스쳐 가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스쳐 지나가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기차가 노량진역에 서지 않지만, 

특수한 지역명이 들어가는 것은 메타포라고 생각했다”


김양기 작가는 “노량진은 하나의 폭포가 아닐까. 수험생은 폭포 밑에 있는 잉어처럼 위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노량진역은 깊이만큼 뜨거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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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야기를 들어도 제목의 의미가 사실 명확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PD의 생각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노량진'이라는 공간은 청춘에게 있어서 목표가 아닌 중간 기착점 혹은 
통과 지점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청춘'이라는 기차는 노량진역에 서지 않는다. 아니, 서면 안 된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노량진 생활 4년차인 33살 모희준과 3년차 수험생인 김윤철.

그들은 컵밥으로 끼니를 떼우며 시간을 아껴 공부하고 있다.

언제나 그가 먹는 메뉴는 1번. 다른 건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1번 뿐이다.



그들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원 조교 아르바이트를 하며 강의를 무료로 듣고 있다.



수업 듣는 중에도 카메라를 계속 관리하는 희준.



오늘은 지난 번에 시험 봤던 서울시 7급 공무원 필기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다.



33살의 희준에게 이제 더 이상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그러나 또 다시 불합격이다. 4년간 수없이 겪었던 불합격의 아픔이 다시 찾아왔다.



답답한 마음에 한강의 마포대교를 찾은 희준. 이곳은 투신자가 많기로 유명한 다리이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언제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때 불쑥 찾아온 한 사람



슬픔으로 울부짖는 희준에게 격려를 해주는 의문의 여성. 희준은 당황스럽다. 



이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하는 희준. 아직 국가직 7급 시험이 남아 있다.



노량진역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장유하. 스무살의 그녀는 전직 기계체조 선수였다.



그러다 노량진에서 다시 우연히 만난 희준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는다.



그녀의 인생 목표는 '카르페 디엠'

바로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한 채 사는 희준에게는 다른 세상의 사람같이 느껴진다.



전국체전에서 우승했던 유하는 희준에게 행운의 징표로 물구나무 열쇠고리를 선물한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사람. 희준은 점점 그녀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에 빠져 학원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알바에서 잘릴 위기에 처하며 혼란을 겪는다. 

국가직 시험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라 

그는 더 이상 그녀와 함께 지낼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반찬거리를 챙겨주셨다.



어머니는 개찰구를 넘어오면 표를 다시 끊어야하는 게 싫어서 

개찰구 너머로 음식을 희준에게 넘기고는 바로 다시 집으로 향한다.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준은 먹먹함을 느낀다.



고시원에 돌아와 보따리를 푼 희준은 어머니가 용돈까지 주셨음을 알게 된다

바로 어머니께 전화해 왜 이런 돈을 넣었냐고 따지지만 어머니는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으니 알바는 그만하고 공부에 매진하라고 하신다.

어머니의 말씀에 희준은 울음이 터져나오는 걸 간신히 참는다.



그때 걸려오는 유하의 전화.

희준은 이제 그녀를 정리하기로 결심하여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제 겨우 그녀와 시작해보나 했었던 순간인데

제대로 꽃도 피기 전에 지고 말았다.

희준은 너무나도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희준.



동생 윤철도 그런 희준을 위로하며 같이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한다.



희준에게 계속 연락을 하는 유하.



그러나 희준에게서 답은 오지 않는다.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공부하는 희준.



그런데 학원의 게시판에 낯익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사진에는 그가 유하와 언제나 만나던 시간과 장소가 적혀있다.

저녁 5시 30분 사육신 공원.



그는 바로 사육신 공원으로 달려 간다.



역시 예상대로 나와있는 그녀.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희준은 기분이 좋다.



희준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 하는 유하.



그러나 희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에게 꿈보다는 현실이 중요하다.

그저 남들처럼만 사는 게 희준의 인생 목표다.

카르페 디엠은 그에게 사치에 불과하다.


그렇게 그들의 만남은 끝이 났다.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일.

드디어 길고 긴 수험생활의 종착역이 보이는 순간이다.

그는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얼른 벗어나고 싶다.



오늘을 위해 4년을 고생했다.



과연 이번에는 합격할 수 있을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날 수 있을까?



드디어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

합격이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이후 면접까지 통과해 최종 합격에 성공한 희준은 조촐한 술자리를 갖는다.

윤철은 1점차로 불합격.

그는 하나 둘씩 떠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과연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합격 후 다시 유하에게 연락을 하는 희준.

그러나 아무리 해봐도 그녀는 받지 않는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가 하는 수산물 가게로 찾아간 희준.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유하의 부고를 듣게 된다.


이제서야 유하의 진심을 알게 된 희준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합격 후 다시 찾은 노량진.



이번에는 그가 항상 먹던 1번이 아닌 새로운 메뉴를 주문하여 먹었다.

'카르페 디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을 즐기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그가 늘 올라오던 노량진의 건물 옥상을 다시 찾았다.

지난 번에 녹아서 제대로 먹지 못했던 아이스크림도 사왔다.

희준은 아이스크림의 맛을 느끼며 유하를 떠올린다.

언제나 현재를 포기하고 미래를 위해 살았던 희준.


하지만 더이상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렇게 갈망하던 내일이다."

라는 유명한 경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희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을 눈으로 보고 머리에 담아 본다.



드라마의 마지막은 노량진역의 전경으로 끝난다.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지만,

청춘은 결코 멈추지 않지만,


'노량진'은 '청춘' 그 자체이다.


우리들의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


청춘.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청춘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유하의 목소리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다.


행복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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