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서평


저자 : 모티머 J 애들러 / 찰스 반 도렌 공저

분야 : 실용

평가 : 나의 인생을 바꿔놓을지도 모르겠다.


<감상>


이 책은 우연히 인터넷에서 추천한 걸 보고 읽게 되었다. 내가 독서법에 관심을 가지게 돼서 샀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나의 이해력이 부족함을 느끼게 해준 책이다.

책을 읽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게 상당히 신선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방법대로 읽으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도 사실상 첫 단계인 훑어보기는 따라하기도 쉽고 굉장히 유용할 것 같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훑어보기는 진지하게 읽어야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빠른 시간 내에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분명 많은 수고를 덜어줄 것이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이 책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고, 또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을 실천해볼 여유가 없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 다시 정독해서 소화시킨 다음 감상도 새로 쓰고 실천도 해봐야겠다.



2006년 2월 작성




문화의 상품화를 통해 바라본 젊은 세대 문화의 비판적 분석


: 정치경제학을 중심으로


1. 문화의 상품화 역사


문화의 상품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주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공황 이전은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으로 대표되는 생산 중심의 사회였다.

미국의 금주법은 금욕이 미덕인 사회를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생산에서 소비로 사회적 의식이 전환되었다.

대공황 이후 소비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소비 사회로 진입한다.

소비에 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노동 이외의 시간은 모두 소비의 시간이 된다.

세이의 법칙이 붕괴되고 유효수요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게 이 시기이다.

자본은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욕망은 억제의 대상에서 자극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개인의 행복과 쾌락이 중시되고 소비가 미덕이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문화의 상품화는 가속화 했다.


상품은 비현실적이거나 환상적 이미지를 제공한다.

- <아케이드 프로젝트> 발터 벤야민


부르주아의 과시적 소비는 차별화 전략으로서의 소비였다.

비과시적 소비는 예를 들어 티나지 않는 명품을 구매하는 것을 말한다.


과시적이든 비과시적이든 결론적으로 계급, 사회적 지위를 브랜드라는 아미지를 통해서

자신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점은 같다.


모방과 허위의식, 기호의 소비 or 차이화의 기술


소비한다는 것은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기호로서 드러내고 과시하면서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별짓기. '취향'이 계급의 지표로 작동한다.

소비는 사회 내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평등하지 않다.

촘촘한 문화산업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는 없다. 개성이 없다.


척도 ex) 연예인. 소비의 타깃은 '지불능력이 있는 유효수요' 전반


2. 젊은 세대 문화의 특징


패스트 푸드, SPA 의류 등 휘발성이 강하다. 또한 프렌차이즈같은 유행에 휩쓸린다.

시각적, 자극적 문화이고 개성을 추구하지만 남과 같아지려는 속성도 같이 가지고 있다.


3. 젊은 세대 문화에 대한 비판


젊은 세대들이 추구하는 개성, 개성화는 실제로는 강제된 차이화에 불과하다.

그들의 개성은 가짜 개성이고 자본에게 종속된 것이 본질이다.

그들은 기업들이 내 놓은 상품 중에서 고르는 것일 뿐 개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CJ의 오디션 프로의 문제점은 문화권력을 남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문화가 자본에 종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자본은 문화를 지배하여 서열화 하고 육체소비를 조장한다.

(건강, 미용, 성형, 식이요법, 다이어트, 대머리)


휴식과 여가는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소비'해야하는 시간이 되었다.

소비가 일상화된 것이다.


휴식과 소비는 모두 재생산을 위한 것이다.


- 복제 문화의 시대 ex) 강남스타일


소비는 사회적으로 학습, 훈련 된다.


지출, 향유, 무계산적 구매 ↔ 절약, 노동, 유산(청교도적 주제)


현재는 지나치게 풍부한 사회이며 우리는 풍부함의 기호가 충만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핍을 느끼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욕망 한다.

항상 부족하다.


교환가치보단 사용가치를 중시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이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자유가 아닌 자본에 의한 강요이다.


소비자의 자유와 주권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참고 문헌>


이진경 편저,『문화정치학의 영토들』, 그린비, 2007.




설탕의 세계사, 설탕, 세계를 바꾸다 서평(아주 간략하게)



Sugar cane harvesting in the West Indies, c. 1830s.


1830년대 카리브해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를 수확하는 모습


출처 : https://myweb.rollins.edu/jsiry/mintzBookOverview5Chapters.htm


설탕의 세계사 - 가와기타 미노루

 

저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책은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를 바탕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설탕을 주제로 세계사를 이야기 하는데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1학년 교양 강의 수준의 상당히 알기 쉬운 서술로 써 내려갔다.


책은 막힘없이 술술 넘어가서 재밌게 읽었다. 그러나 주경철의 대항해시대와 같은 면밀한 분석은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이 책을 읽고 특별히 새로 알게 된 내용은 별로 없다. 이 책은 더 어려운 책을 읽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설탕, 세계를 바꾸다 - 마크 애론슨

 

이 책은 설탕을 주제로 한 문화인류학 서적이다. 삽화나 사진 자료가 풍부하게 들어가 있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인류학적 접근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어 다 읽지는 않았다.



설탕 무역을 주제로 한 책들은 꽤 많이 있다.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이 가장 대표적인데 나중에 한 번 읽어볼 생각이다.


설탕 무역이 세계 경제에 미친 영향은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다.




문화자본과 한국 사회

 

1. 문화자본이란 무엇인가?

 

문화자본이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이다. 이 글에서는 부르디외의 저서를 참고하여 문화자본 개념을 설명하려 한다. 이하의 내용은 부르디외의 저서를 참고해 이동연이 쓴 <문화자본의 시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문화자본은 상징적 표현이 화폐나 재산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하여 결정된 교환가치로 정의된다. 부르디외는 문화를 단순히 정신적인 산물만이 아니라 자본의 형태를 가진다고 말하였다. 이때 자본은 화폐가치 뿐 아니라 문화예술의 취향을 드러내는 심미적 가치와 학력과 혈통에서 축적된 사회적 자산을 포함한다. ‘문화의 자본은 화폐경제와는 달리 계량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물질성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개인과 집단 일체의 상징적, 정신적, 심미적 능력과 그것의 축적 상태로 정의된다.


이것은 경제적 부를 결정하는 화폐자본보다 개인의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으로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한 사회의 문화적 표상과 수준을 결정한다. 문화자본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주체, 혹은 집단적 장과 그렇지 못한 주체, 혹은 집단적 장 사이의 문화적 구별 짓기를 시도한다. 문화자본은 언어 능력, 문화예술의 정보와 지식 습득능력, 문화적 취향의 형성과 문화적 능력으로 인한 자본의 취득으로 인한 계급의 불평등 관계를 유지하고 확산하는 데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은 그런 점에서 세 가지 형태를 가진다. 첫째는 체화된 문화자본으로서 개인의 몸에 각인된 품위, 세련됨, 교양의 수준을 가늠한다. 둘째는 객관화된 문화자본으로서 그림, , 음반 등 문화적 재화 형태의 자본을 의미한다. 이는 특정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하는 전문예술인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특정 구매자들이 형성하는 자본이다. 셋째는 제도화 된 문화자본으로서 학위와 자격증 형태의 문화자본을 말한다. 이상이 부르디외 문화자본 개념의 간략한 설명이다. 이 글에서는 부르디외 문화자본 개념 중 체화된 문화자본과 제도화된 문화자본을 중심으로 서술하려 한다.


2. 한국 사회에서의 문화자본

 

한국사회에서의 문화자본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가장 첫 번째는 학력자본이다. 학력자본은 제도화된 자본의 한 형태로서 학위나 학벌 등을 말한다. 학력자본을 취득하는 과정에서는 경제자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70년대까지는 부모의 경제자본이 자녀의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이 지금보다 많이 낮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가 돈이 많은 쪽이 입학하는 비율이 올라갔다. 그것은 서울대 입학생들의 부모의 소득, 직업이나 거주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입학생의 부모가 전문직이나 대기업 간부급 직원인 경우는 늘어나고 농업, 임업, 어업 등에 종사하는 부모의 수는 줄어들었다. 또한 강남8학군이나 외국어고, 과학고 등 특목고 출신의 학생들이 많이 늘어났다. 서울대 뿐 아니라 서울 시내 유명 사립대학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사교육이 번성하면서 대학진학은 돈에 의해 상당부분 결정된다. 이곳의 학원들은 1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다. 1달에 수 백 만원을 호가하는 과외도 성행하고 있다. 영어 유치원, 사립 초등학교, 국제 중학교, 외국어 고등학교/과학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과정은 공식화되었다. 이제 학생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편 80년대 까지만해도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학력자본의 취득을 보장했지만 90년대 이후 대학 진학률이 극적으로 높아지면서부터는 양상이 달라진다. “한국의 학력자본의 권력은 학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학위의 서열, 즉 특정 엘리트 대학의 학위에 의해 재생산된다. 특화된 학력자본은 기득권 사회를 보호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제가 된다.”(Dongyeon, Lee)


반면 국내 대학 진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해외 대학으로 진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80년대까지의 유학은 대부분 대학 졸업 이후 혹은 석사 졸업 이후에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는 <77>으로 대표되는 조기유학 붐이 일었다. 이미 상류층 사이에서는 미국의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만약 학부는 한국에서 마치더라도 최소한 석사는 미국에서 하는 식이었다.


그것이 1993년 하버드대를 졸업한 홍정욱이 쓴 <77>이라는 책 때문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것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 학력자본 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간 계급도 이 랠리에 동참한다. 1997IMF 외환위기라는 경제적 시련도 있었지만 유학 열풍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유학생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때 나온 용어가 기러기 아빠이다. "기러기 아빠는 한국에서 자녀의 교육을 목적으로 부인과 아이들을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한국에 남아 뒷바라지하는 아버지들을 말하는 신조어이다."(Wikipedia)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의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한국도 경제적 성숙기에 접어들며 경제성장이 정체되었다. 또한 산업의 고도화로 노동력이 예전에 비해 덜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유학생들이 꾸준히 증가한 결과 이제 더 이상 유학이 큰 메리트가 아니게 되었다. 초기만 해도 유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한 학력자본을 의미했다. 당시는 미국의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그 자체로 보증수표의 역할을 했다. 특별히 검증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기에 졸업장 하나만 보고 판단을 하였다.


2007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학력위조 논란은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전 동국대학교 조교수이자 2007년에 광주 비엔날레 공동 예술 감독으로 내정된 바 있는 신정아가 예일대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이 거짓으로 드러나며 파문이 일었다. 이 사건으로 촉발된 학력위조 논란은 각계각층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 결과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자신들의 학력을 위조하였음이 드러났다. 이때 외국 대학의 학위는 상대적으로 검증하기가 어려웠기에 의도적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었다. 현재는 미국의 어느 대학이 좋은지 한국에서도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따라서 이제 미국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국의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가 중요해졌다. 국내 대학의 양상과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2015년 한 소녀가 미국의 명문대인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에 동시 합격했다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확인결과 천재소녀로 불린 이 학생이 두 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에 입학 허가를 받아 천재 수학소녀로 보도된 미국 토머스제퍼슨 과학고 3학년 김모양의 주장이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Kyunghyang)


그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불과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서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이 상징하는 학력자본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제 겨우 18살밖에 안 된 소녀가 전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처럼 학력자본은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학력자본은 어떤 점에서 중요할까? 그 이유는 경제자본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창업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최대 로펌이라 불리는 김앤장은 서울대 출신을 선호하기로 유명하다. 로스쿨이 생기기 전 법대가 있을 때에는 서울대 중에서도 법대 출신을 더 우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국내 최대 로펌으로 법조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장법률사무소의 주력 부대는 서울대 법대 출신의 1970년 이후 출생한 젊은 변호사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heraldcorp)


회계법인도 마찬가지이다. 출신대학 별로 할당량을 정해놓고 뽑는다는 말도 들린다. 때문에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원래의 대학보다 더 좋다고 여겨지는 대학으로 새로이 편입하는 경우도 있다. “주목할 점은 연세대 경영학과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스펙이 당장 취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고스펙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굳이 '연세대'라는 타이틀을 따지 않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학교에 재학 중이고, 학점과 토익점수도 높고 간혹 CPA(공인회계사) 합격자까지 있다.”(Ohmynews) 다른 전문직들도 비슷하다.


창업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네에서 치킨집을 하거나 중국음식점을 한다면 학위가 필요 없다. 하지만 IT 스타트업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이 영역에서는 열정과 패기, 번뜩이는 창의적 생각만 있으면 될 것 같다. 물론 그런 요소들도 중요하지만 학벌도 아주 중요하다.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IT 스타트업에서 학벌이 중요한 이유는 자본 유치때문이다. 20대 혹은 30대의 젊은 청년들이 만든 회사는 대부분 형편없다. 그들은 아이디어는 가지고 있지만 그 아이디어를 실현할 자본이 없다. 여기서 투자 유치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투자자는 어떤 점을 가장 중요시 할까? 사실 아이디어는 두 번째나 그 뒤인 경우가 많다. 투자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요소는 회사의 인력이다. 이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떤 경험을 쌓아왔는지를 평가한다. 창업자들이 좋은 대학 출신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능력을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실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 부분을 이야기 한다.


우선 장병규 대표는 "관련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 똑똑한 사람들이 명문대에 있기 때문인데요. 그는 "실리콘밸리에서도 스탠포드 박사 3명이 모이면 무조건 투자를 받을 수 있다""전문성을 인정받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Newstomato) 한편으로 학력자본에서 파생되는 인맥도 있다. 창업자의 동창생들이 같이 일하고 동종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다면 굉장한 플러스 요소가 된다. 이와 같이 학력자본은 창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유치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연예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연예계는 학력과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중들이 연예인을 평가할 때는 외모, 노래 실력, 연기력, 쇼 프로그램 진행 능력 등을 주요한 요소로 평가한다. 그러나 학력자본은 연예계에서도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한다. 명문대 출신의 연예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명문대 출신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연예인은 지적인 이미지를 획득한다. 그 이미지는 광고 모델료나 드라마 출연료, 행사 출연료 등의 화폐가치로 전환된다. 서울대를 졸업한 여배우 김태희는 학력자본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한 명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에서 명문대 출신 연예인들은 다른 사람보다 앞선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단순히 명문대를 나왔다는 사실이 화폐가치로 바뀌는 과정은 학력이 자본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력자본은 경제자본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처음에 언급했다시피 학력자본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경제자본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경제자본이 부족하면 학력자본을 취득하기가 어렵고, 그것은 다시 경제자본을 취득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상류층들은 경제자본을 자녀에게 세습시키기 위해 자녀가 학력자본을 취득시키게 만든다. 이것은 결국 부의 대물림이다.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자본의 또 다른 양상은 체화된 자본이다. 이것은 연예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방송된 몇 개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연예인 가족이 출연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오 마이 베이비’, ‘아빠를 부탁해’, ‘유자식 상팔자’, ‘붕어빵등이 있다. 이 방송의 주요 컨셉은 어린 자녀와 연예인 부모가 나와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연예인 자녀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방송에 출연할 기회를 얻는다.


이들은 가정에서 연예인 부모들에게 방송에 적합한 연예인이 되기 위한 덕목들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또 그것을 방송 출연을 통해 실습한다. 방송 출연을 통해 얻게 되는 돈은 물론이고 체화된 자본까지 획득하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의 인맥을 이용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게다가 방송 출연을 통한 자신의 명성 획득은 향후 연예인이 되었을 때에 엄청난 자본이 된다.


아빠를 부탁해에 출연했던 한 연기자의 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배우 조재현의 딸인 조혜정은 그 자신도 배우이다. 그녀는 아빠를 부탁해에 출연하기 이전에도 여러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빠를 부탁해 출연 이후 단편 드라마에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갑자기 주연이 되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인맥 때문에 뽑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혹자는 아빠를 부탁해 출연 이후 인지도가 상승했기 때문에 뽑았다고 말한다. 둘 중 어느 경우이든 아버지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


물론 그녀의 주연 발탁은 감독이 결정하는 문제다. 감독이 그냥 마음에 들어서 뽑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이 생긴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문화자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번 논란에서 많이 등장한 금수저라는 용어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금수저는 한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단어이다. 어원은 은수저에서 나왔다. 은수저는 영어권에서 세습된 부를 의미한다. “The English language expression silver spoon is synonymous with wealth, especially inherited wealth; someone born into a wealthy family is said to have "been born with a silver spoon in his mouth.””(Wikipedia)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은보단 금을 이용한 언어표현이 많았기에 금수저를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경제자본의 세습뿐만 아니라 문화자본까지 세습되고, 다시 그 문화자본이 경제자본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본 대중들의 박탈감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연예계에서 나타난 문화자본의 세습은 2015년 현재의 한국 사회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학력자본의 획득을 위한 유학은 단순히 학력자본의 획득만이 아닌 체화된 자본까지 얻을 수 있는 기회다. 최근 일부 상류층들 사이에서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바이올린, 첼로 등의 악기 연주, 미술작품 감상, 골프, 승마 같은 전통적인 귀족적 교육 뿐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세계 각지 여행을 시킨다. 방학 때 학원에만 보내서 빠르게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단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이 더 이상 교육에만 매달리지 않는 것은 어차피 돈은 돈이 벌기 때문이다. 중간계급들의 경우 자신들이 가진 자본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낭비하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자녀들이 최대한 빨리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을 원한다. 반면 부유층들은 조급하지 않다. 그들은 자녀가 공부에 실패했을 경우에도 살아오면서 축적한 문화자본을 통해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20대 중후반에 사회에 진출했을 때 그들이 가진 문화자본은 또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유학생 출신들이 서울의 이태원, 홍대, 강남 등지에 식당이나 술집을 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유학생활 동안 쌓아온 경험들이 문화자본으로 축적되어 경제자본으로 변환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이 쌓아온 경험은 문화자본이라는 형태로 축적되고 경제자본으로 전환된다.

 

3. 결론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관통하는 주제는 한국사회에서 문화자본은 계급 재생산의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역사는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했다. 누구나 공평하게 문화자본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 십 년이 지나며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나라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경제자본을 축적한 계급이 탄생했고, 그 계급은 자신들의 경제자본을 지키기 위해 문화자본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성은 더 단단해졌다. 이것이 젊은 세대 내에서 헬조선, 금수저 담론이 유행하는 이유이다. 계급이 고착화 되어 이제는 더 이상 개인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상류층들이 경제자본 뿐만 아니라 문화자본까지 독점하는 상황은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에 좋지 않다.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순자의 사상 요약(펌) - 어디서 퍼온 건지 기억이 안 난다. 출처를 적어놨어야 하는건데.


1. 순자의 人性論


 순자는 인성을 배워서 행할 수 없고 노력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데도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배우거나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순자에 따르면 인성이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의로움으로 판단능력, 인식능력, 사유능력 등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는 감각본능으로 신체를 통해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세 번째는 생리적 욕망으로 추우면 따뜻해지고 싶은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심리적 욕구로 인간은 이익을 얻고자 하고 손해를 회피하고 싶어 하며 원한, 분노, 증오 등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순자는 이를 통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서로 쟁탈을 하게 된다는 성악설을 펼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순자의 인성론은 인간의 맹목적 충동을 강조하고 가치 추구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순자의 禮論


 순자는 사람이란 무리를 이루어 사는 사회적인 동물이며, 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며 원활히 살아가는 데에 사람의 특징이 있다 하였다. 사람은 여럿이 화합할 수 있다는 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사회를 떠나서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의로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 의로움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분별과 규범으로 나타나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순자는 禮를 정치적 제도, 사회적 규범, 생활규범 등의 질서성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가 생긴 이유는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예의의 필요성은 성악설과도 관계 지어 설명할 수 있는데, 사람에게는 본디 욕망이라는 악한 본성이 있어서 그대로 내버려두면 서로 충돌해 큰 혼란이 일어난다. 그래서 덕이 많고 모든 이치에 통달한 이상적인 인간인 先王(성인)들은 그 혼란을 막기 위해 예의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예는 선과 악의 기준으로서 혼란을 다스리고 사회적 이익을 가져온다.


3. 순자의 修養論


 순자는 선(善)은 위(僞)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이 위(僞)는 허위나 거짓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人爲)로서 사람이 행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人性은 본래 惡한 것이며, 善한 것은 人爲적인 것이다. 이처럼 人性이 본래 惡하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의 것을 빼앗고 폭력을 휘둘러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순자는 맹자와는 달리 교육이라는 후천적인 훈련과 예(禮)와 법(法)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惡한 性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자는 사물의 관찰이나 판단을 정확히 하자면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맑고 깨끗함에서 얻어진다고 하여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에 집중하면 고요해진다는 허일이정을 주장한다. 


또한 순자는 도덕성의 기초를 인간 정신의 인식능력인 지능(知能)에서 찾았다. 인간은 '지'(知)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이기적인 자기본성을 제어한다. 순자는 적선과 적습을 축적해 가는 계속적인 과정을 중시해서 그것을 통해 인간은 악한 본성을 통제할 수 있고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4. 순자의 영향


첫 번째로는 생명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부각으로 삶에 대한 현실적 접근과 기틀을 제공하였다. 


두 번째로 天을 自然으로 인식하여 하늘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이 하늘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순자의 이러한 사상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과학 정신과 완전히 합치된다. 순자에 의하면 하늘의 도는 하늘에만 통용되는 것이고 사람의 도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늘의 권위에 의해 지탱되어 오던 인간의 미신들도 모두 깨어져 버렸다. 


세 번째로 학습과 경험지식의 습득 등 경험을 중시하였다. 


네 번째 실용주의적 경향으로 미신을 부정하고 욕구와 욕망의 충족을 이야기 하였다. 心을 도덕적 행위는 이미 인간 마음에 내재 되어 있다는 도덕심이 아니라, 먼저 알아야 행할 수 있다는 타율도덕적 관점인 인식심으로 바라보았다.


 



한국 문화자본의 역사 - 간략한 설명

 

먼저 한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1894년 갑오개혁의 실시로 신분제 질서가 사라지고 1910년 국권피탈로 왕조가 무너졌다. 한국은 36년간의 식민지배 기간이 끝나고 1945년 광복을 이루어내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농지개혁을 실시하며 지주 계급이 상당부분 무너졌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사실상 없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기간 동안 경제는 발전했지만 소득 격차는 크지 않았다. 문화자본이라고 할만한 것도 거의 없었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이 문화를 완전히 탄압했던 것과 다르게 전두환 정권은 빗장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통제가 줄어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통행금지 해제와 교복 및 두발 자율화이다.


한국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조금씩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3S 정책(Screen, Sports, Sex)도 크게 보면 문화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컬러TV의 보급과 성인영화 상영, 프로페셔널 스포츠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 당시 여의도에서 있었던 국풍81도 문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정부가 이런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70년대까지의 절대적 가난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문화는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되었다. 소방차나 김완선 같은 댄스 가수들이 등장했고 90년대 들어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며 한국 대중문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97IMF 외환위기 이후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가 점차 심해지면서 문화에도 새로운 양상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경제자본을 축적해온 계급이 이제 문화자본까지 독점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중간계급 중에서도 상층을 따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2015년 현재는 상층 계급이 모든 것을 다 장악해 가고 있다.



2015년 12월 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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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주경철 저

 

이 책은 근대 세계사를 해양 문명의 관점에서 조망한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단순히 몇 몇 나라를 중심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15세기부터 시작된 근대 해양 세계의 팽창은 세계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세계의 여러 지역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바다를 통해 통합적인 체제 하에 들어갔고, 각 나라들은 자기들만의 세계가 아닌 전 지구적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양존하는 복잡한 양상을 나타냈다.


한편 우리가 공부했던 세계사는 대부분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이 지배적이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그런 유럽중심주의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이 유럽이 해왔던 모든 역사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유럽은 15세기 이후 점점 강력한 세력을 떨치며 19세기에 들어서는 제국주의적 지배자로 떠올랐다. 저자는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저술하고자 하며, 우리가 잘못된 지식으로 배웠던 신화적인 인식 틀을 수정하고자 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지적한다.

 

책의 구성은 제1근대 세계구조의 형성’, 2폭력의 세계화’, 3세계화·지역화된 문화등 총 39장으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근대 세계의 전반적인 구조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짜여 졌는가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1장의 핵심주제는 중국의 해상 후퇴와 유럽의 해상 팽창으로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근대사 발전의 결정적인 구조적 전환의 계기라고 말한다.


15세기 초 세계 최고의 해양 문명을 자랑하던 중국의 명() 왕조는 왜 바다를 떠났던 것일까?


당시의 아시아는 해상 교역 망이 상당히 발달했었다. 정치·군사 세력이 분산되어 있고 문화적으로 아주 다양하여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비동질적인 곳이었다. 아시아의 바다에서는 각지의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고 이방인들을 배척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화의 대 원정이다. 정화의 대 선단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고,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중국의 위엄을 만 천하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떠났던 그들은 갑자기 한 순간 문을 닫아 버린다. 북쪽의 유목 민족 세력들의 위협과 내륙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정권을 장악하여 해상 팽창을 주도했던 환관세력의 몰락 등이 그 이유로 꼽힌다.


중국의 이 결정은 근대 세계사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때마침 아시아의 바다로 진출한 유럽 세력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사이 중국은 울타리를 쌓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잘 알다시피 아편전쟁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세계사의 거시 구조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을 제시하는데 유럽중심주의, 지구사, 세계체제론 등이 그것이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2장은 초기 해상 팽창의 주역이었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제국 확장과 식민지 개척에 대해 이야기 한다.


2부 폭력의 세계화에서는 해상 진출의 도구였던 선박·선원·해적 등의 자세한 설명으로 시작하여 근대의 폭력이 어떻게 자행됐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군사혁명과 유럽의 폭력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와 더불어 여러 군사 문화를 살펴본다. 또한 해상 교역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화폐와 귀금속의 세계적 유통이다.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당시의 세계 경제 체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예무역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서양 삼각 무역의 실태와 그 밖의 지역에서 벌어졌던 노예제에 대해 샅샅이 들여다본다. 3부 세계화·지역화된 문화에서는 환경을 주제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해양 문명의 팽창이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여러 사례들의 제시를 통해 살펴본다. 삼림 파괴, 멸종, 각종 전염병의 발발 등은 단순히 생태계에 일어났던 변화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에 걸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음을 밝힌다.


다음으로는 기독교 문화이다. 그들이 바다로 떠났던 것은 단순히 경제적 목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신대륙의 발견자로 흔히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또한 경제적 목적 외에 종교적 목적으로 에덴동산을 찾아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삶과 마찬가지였던 기독교 문화는 전 세계의 수많은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각지에서 잘 살고 있던 사람들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들이 강요하는 선교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갈등으로 수많은 희생이 벌어졌다.


마지막 9장에서는 언어·음식·과학 기술 등을 주제로 이야기 한다. 아메리카 노예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크레올 언어는 의사소통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음식의 전파는 엄청나게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아메리카 대륙의 작물이었던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은 전 세계 각지로 퍼지게 되어 식량난에 허덕이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주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이러한 작물들을 대량으로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또 중요한 작물로 사탕수수를 들 수 있다. 인도 지역의 작물이었던 사탕수수는 카리브 해와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탕수수는 인력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한 작물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엄청난 수의 흑인 노예들이 잡혀오게 되었다. 이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설탕은 영국으로 수출되어 홍차에 설탕을 넣어서 마시는 문화가 생겼다. 초기에는 귀족이나 자본가 계급만 마실 수 있는 귀한 것이었지만 생산량의 폭발적 증가로 서민 노동자 계층도 쉽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의 주 음료는 브랜디 같은 술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홍차로 자연스럽게 대체되었다. 산업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휴식시간에 술을 마시게 되면 다음 노동에 지장이 있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던 참에 홍차라는 멋진 대체재가 나타난 것을 기뻐했다. 이제 노동자들은 취하지 않으면서 맛있는 음료수를 마시게 되어 다음 노동에도 지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설탕은 칼로리가 높아서 부족한 열량을 채우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사탕수수 하나가 전 세계 경제 체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고 재밌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평가하자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위의 이야기 같은 새롭고 접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서 15~18세기 근대의 해양 문명사를 통해 세계사를 접근하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다.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역사를 학부 수준의 내용으로 알기 쉬운 서술방식을 채택해 읽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고, 그 당시를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전반적으로 개설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책은 개설서로 활용하고 더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으면 세부 주제에 관련된 서적과 논문을 찾아보라는 뜻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가 있었던 것은 화폐와 귀금속의 유통, 음식의 전파 두 가지 주제였다. 나중에 이와 관련된 서적들을 읽어서 더 자세하게 알아볼 것이다. 이렇게 지적 욕구를 채워주고 또 관심 있는 주제를 알 수 있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다.


 

2015년 7월 2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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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해상 무역망


출처 : 역사저널 그날 E103 151220 해신 장보고, 염장의 칼에 죽다



9세기 통일신라 시절에 활약한 해상무역가 장보고.

그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인 청해진에서 동아시아 무역망을 구축하였다.



신라가 당에 수출하는 물품들은 금, 은, 동, 비단, 금속 공예품이 주를 이루었다.



당에서 신라로 수출하는 것은 서적, 차, 비단 등과

(서적은 최신 학문들이 중국에서 연구되기 때문에 신라에게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에메랄드 슬슬, 향료, 페르시아산 모직물(양탄자, 카페트) 등이 있다.

서아시아의 물품이 중국에 들어오고 다시 중국을 거쳐 신라까지 온 것이다.

교역길이 아시아 전체를 아울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망을 구축한 장보고.


그는 뛰어난 사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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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사회

 

 

<목 차>

 

1. 개인과 사회의 관계

 

2. 마키아벨리 현실의 직시

 

3. 홉스 사회계약이론의 도입

 

4. 로크 절대권력의 부정

 

5. 루소 순진무구한 자연상태와 선악이 교차하는 사회

 

6. 칸트 이성적 개인과 도덕의 개선으로서 시민사회

 

7. 헤겔 사회계약론 비판과 자유실현으로서 인륜적 국가

 

8. 원자적 개인과 공동체적 개인

 

 

 

 

 

1. 개인과 사회의 관계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살아왔다. 이것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다르지 않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순자는 사람이란 무리를 이루어 사는 사회적인 동물이며, 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며 원활히 살아가는 데에 사람의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사람은 여럿이 화합할 수 있다는 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사회를 떠나서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철학자들은 사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더 나아가 사회가 개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했다. 그리고 사회의 성립근거는 무엇이며 사회는 개인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개인은 이런 사회의 요구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등에 대한 탐구는 중요한 철학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철학자들은 개인과 사회의 문제들에 대하여 다양한 해답들을 제시해왔다. 유럽에서는 종교적 권위와 이에 근거를 둔 권력과 제도, 질서가 점차 영향력을 상실한 근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자들은 더 이상 신의 권위나 종교적 교리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여기에서는 마키아 벨리에서 헤겔에 이르는 근대철학자들의 이론을 중심으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본다.

 

2. 마키아 벨리 현실의 직시

 

마키아 벨리는 군주론을 쓴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모든 권모술수와 교활한 방법들이 통치를 위해서라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을 주장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군주론에서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종교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현실을 직시할 줄 알고 현실적 국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유능하고 강력한 통치자 또는 입법자가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현실인식은 당시 이탈리아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즉 종교적 권위의 상징인 교황이 이탈리아를 통일할 정도의 힘을 지니지는 못했어도, 다른 통치자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것을 방해할 만한 힘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통일국가가 될 수 없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본성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공격적이고 탐욕스럽다. 따라서 인간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어떤 법률이나 외부적 강제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항상 무정부상태와 같은 혼란을 초래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 때문에 국가가 필요하며 국가의 성립근거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이기적인 인간들의 현실적인 욕구와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일 뿐 국가의 구성에는 다른 어떤 종교적 근거나 도덕적 당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재산과 생명을 보존하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기본적인 임무를 지니며 이 임무를 완수할 경우에만 그 존재가 정당화 된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마키아 벨리가 가정하는 것은 국가에서는 통치자 또는 입법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소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성공적인 국가는 한 사람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하며 오직 그만이 법률을 제정하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통치자는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국가의 기본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능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마키아 켈리의 주장은 뒤에 등장한 홉스의 정치철학을 예견하는 많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체계적인 사상을 제시하지는 못 했지만 종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를 바라보는 현실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 홉스 사회계약이론의 도입


홉스는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성악설을 기반으로 인간들은 자연 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한다고 보았다. 자연 상태에는 규범, 윤리, , 질서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개인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 상태를 불안하다고 보았다


감각적 경험의 욕구도에 따라서 개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계약을 맺어서 사회를 구성한다. 여기에서 규범, 도덕, 윤리가 생겨났다. 또한 홉스는 왕을 성경에 나오는 바다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했다. 왜냐하면 왕에 의한 통치는 부당하지만 계약상태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홉스가 위대한 점은 첫 째로 개인주의를 확립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왕정의 지지자였지만 왕권신수설은 부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왕권은 신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인민의 동의로부터 나온다. 개인의 안전을 조건으로 왕과 인민이 서로 계약을 맺은 것이기 때문에 왕은 개인의 안전을 해쳐서는 안 된다. 왕조국가에서는 현명한 왕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왕이 즉위할지 몰라서 인민들이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홉스의 사상으로 누가 왕이 되든 상관없이 개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중세 기독교가 모든 나라에 공통적 윤리규범으로 작용했었지만, 홉스 이후에는 계약조건에 따라 나라별로 다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윤리규범이 선천적, 절대적,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며, 중세 기독교적 윤리 규범을 깨부순 근대적 사상이었다.

 

4. 로크 절대 권력의 부정

 

로크는 사회가 구성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는 결코 개인의 무한한 욕망과 이익이 대립되는 투쟁 상태가 아니라 평화와 선의, 상호원조와 원활한 종족보존이 유지되는 상태라고 가정한다. 로크에 따르면 자연 상태는 이미 자연법과 자연권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며, 각 개인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소유와 권리에 대한 존중이 자연법상의 의무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이다. 자연 상태는 이미 자연법으로부터 비롯된 도덕적인 권리와 의무가 어떤 구체적인 법률보다도 선행하여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연 상태에서 일종의 불편이 발견되기 때문에 인간들은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의 불편이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자신의 주장에 따라 행위하여 마찰이나 시비가 발생할 경우 이를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는 재판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공동체를 구성하기로 결정한 개인들은 일단 자신의 권리 가운데 일부를 위임한다. 이렇게 로크가 조건적인 권리의 위임을 강조하는 데에는 어떤 형태의 절대 권력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내면적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즉 조건적으로 권리를 위임 받고,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에만 성립하게 되는 정부는 결코 절대 권력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일종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서 세워진 정부가 개인의 생명과 재산 전체를 위협하거나 빼앗을 수 있는 절대 권력을 소유하는 일은 결코 용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


로크는 누군가가 절대 권력의 정부를 인정하고 이 정부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기꺼이 양도하더라도 이는 양도할 수 없는 것을 임의로 양도한 것이기 때문에 이 계약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이를 통하여 로크는 절대 권력을 부정하며 개인에 의한 정부의 견제와 혁명을 충분히 정당화하는, 더욱 근대적인 개인과 정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확립했다고 말할 수 있다.

 

5. 루소 순진무구한 자연 상태와 선악이 교차하는 사회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의 이행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유용하지만 동시에 가장 뒤떨어져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지식이다. 인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화 되고 문명화된 단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연 상태 본연의 모습은 상실되었거나 변형되었으리라 추측한다. 사회문화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 자연인 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문명인이 인간 본래의 모습인 자연인과 자연상태를 파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루소는 자연 상태와 그것에 대한 진리는 역사적 진리가 아니라 가설적·조건적 추리임을 인정한다.

 

홉스의 자연인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일종의 건장한 어린아이와 같다. 루소의 자연인도 어린아이로 비유되지만, 홉스처럼 어린아이의 탈을 쓴 어른이 아니라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그 자체이다. 순진무구한 자연인은 광대한 산림 가운데서 일정한 거처도 없고,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서로 얼굴도 모르고, 대화할 일도 없이 동물처럼 평화롭게 지낸다. 아무도 자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으며 소유권에 대한 개념도 없다


자연인은 서로 부딪힐 기회도 많지 않지만, 부딪쳐도 이해관계의 대립이 부각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기 구역을 침범하더라도 다른 구역으로 옮겨 가면 그만이다. 여기에는 불평등뿐만 아니라 악도, 악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선악개념도, 도덕적 관계도,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넓은 자연 공간에서 그저 자기보존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자기애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락한 자연인의 삶에 비한다면, 불평등과 다양한 악에 시달리는 사회인에게 자연 상태는 잃어버린 낙원과 같다.

 

그런데 왜 인간은 평등한 자연 상태에서 불평등한 사회 상태로 이행하는가? 살다보면 자기보존과 행복에 방해되는 요소가 나타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정신에 관계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사물을 파악하는 최소단위에 해당되는 비교개념에 따라 표현되는 관계는 자연인의 마음에 반성무의식적 신중함을 낳는다. 반성하는 가운데 지식이 생성되고 증가하며, 이로 인해 인간은 동물에 대한 우월성을 느끼게 된다. 우월성은 존재의 서열개념과 인간 자신에 대한 자존심을 낳는다


자존심은 관계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작동하는 이성의 산물이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면 개인들은 타인에게서 경험하진 않았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이면 자신과 같은 행동·사고방식·감정 등을 지닌다는 일치감을 느끼게 된다. 일치감과 공통성에 대한 발견은 인간에게 추론능력을 주고, 목적 실현에 적합한 규칙을 낳는다. 그래서 자기보존과 자신의 행복추구는 타인보존 및 타인의 행복추구이며 공동체 전체의 보존 및 행복과 관계하게 된다.


자연인에게 사회라는 개념은 생소하지만 사회 상태로 이행하려면 최소한 사회의 목적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떻게 사회의 목적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가? 그것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왜 자연인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가? 이를 위해 루소는 자존심과 예의범절을 낳는 이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감성을 제시한다


루소의 자연인은 자기중심적이긴 해도, 타인을 만났을 때 그를 해치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에게서 입을지 모르는 피해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데 더 신경을 쓴다. 고통을 싫어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감정은 타인이 고통받을 때도 그를 동정하는 자애심(연민의 감정)’으로 발휘된다. 이것은 이성이나 자존심보다 선행하는 원리이며, 자연법의 모든 규칙을 도출하는 감성적 원동력이다. 자애심은 반성과 이성보다 더 근원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인이 타인과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로 이행하는 원동력은 자애심과 자존심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으로 사유재산이 필요하다. 사유재산은 소유를 확인하기 위한 정의의 규칙들을 요구하며, 소유권은 자연권과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권리이다. 사유재산의 등장으로 선악개념이 생기고, 선으로의 진보와 더불어 악 내지 불평등도 심화된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은 시민사회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범죄와 전쟁과 살인을 야기하는 악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사회화는 인류의 진보와 타락의 동시적 발생이며 선과 악의 동시적 심화과정이다


인간사회를 살펴보면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억압이 만연한다는 사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으며, 사회 속의 개인은 이미 악에 물들어 있어서 잃어버린 악원으로 회귀하기 어렵다. 그래서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구호에 담겨 있는 자연상태로의 회귀욕구는 선을 극대화하여 자연상태에 근접한 모습을 창출해내는 방식, 즉 문명의 극단적 진보를 활요하는 방식말고는 없다. 이를 위해 루소는 정당한 권리, 권위, 의무의 기초가 되는 합의와 약속으로서 사회계약을 최대한 활용한다.

 

루소의 관점에서 사회계약의 근본정신과 의의를 인정하는 개인은 자기의 모든 권리와 함께 자신을 공동체 전체에 양도하게 된다. 모든 권리를 공동체에 양도하는 것은 억압과 불평등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처럼 타인들도 똑같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공동체에 양도하기 때문에, 자기를 공동체에 양도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자기를 양도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기를 사회에 전적으로 양도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며, 자유를 양도하는 것은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권리 양도자는 인간 전체와 결합하며 하나의 정신적이고 집합적인 단체가 된다


이 집합적 단체의 의지는 사회구성원의 공통의지이며, 공통의지는 일반의지이다. 개인들의 의지와 목적을 일반의지로 실현하려고 할 때, 루소는 일반의지의 담지자를 수동적으로는 국가로, 능동적으로는 주권자로, 정치체제로는 공화국으로 일컫는다. 이러한 공화국의 법과 정의는 신으로부터 나온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간에 서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인정의 근본적 원리가 바로 약속과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의 자의성을 고려한다면 그 결과물인 공화국은 절대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6. 칸트 이성적 개인과 도덕의 개선으로서 시민사회

 

홉스, 로크, 루소 같은 사회계약론자는 개인의 삶을 보호하는 최종점을 국가로 간주한다. 이들에게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해명하는 결정체는 국가와 법이다. 그러나 칸트는 국내법의 차원을 넘어서서 국가 간의 관계로까지 지평을 확장하고 세계사적 전망에 기초하여 국제법과 세계시민법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국가뿐만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의 이해를 요구한다


칸트는 인간행위를 보편적 체계로 정립하기 위해 인류의 출발점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세계사를 전개할 때 발생론적 설명의 단초가 엿보이며, 이 속에서 개인과 사회에 대한 관계를 총체적 관점에서 논할 수 있다. 칸트는 개별대상의 합목적성을 주어진 대상들의 총괄 개념인 자연 전체에 확장시켜 적용하며, 더 나아가 비자연적 역사에까지 적용한다


그런 연유에서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세계사적 운동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합목적성과 자연의 법칙이 사회와 역사인식의 모델이 된다. 칸트는 역사의 전개 속에 투영된 합목적성을 자연의 계획, 자연의 의도라고 일컫는다.

 

칸트의 자연인은 말과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이성능력을 지닌다. 개인과 사회의 목적을 자기보존과 행복으로 간주하는 루소와 달리 칸트에게 목적은 선의 실현이고 선의지에 기초한 도덕성 개선에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이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때 도덕성의 개선은 인간본성인 자연적 소질의 계발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한 개인에 의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유적과정으로서 세계사적 전개를 필요로 한다. 자연의 계획의 시초에 서 있는 인간은 동물적 본능에 기초하여 이성을 발생론적으로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인간의 사회화가 드러나고 사회성의 근본적 원리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최초의 본능은 신의 음성에 따라 음식물 섭취 여부를 판별하는 후각작용이다. 이 최초의 본능에 후각과 다른 시각적 감관이 작동하면서 음식물을 기존의 섭취물과 비교하는 이성이 개입되며, 비교에 의해 축적된 지식은 본능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이성은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서 동물적인 자연적 충동 이외의 인위적 욕망반자연적 경향들을 만들어 낸다.

 

이성의 두 번째 진보는 섭취본능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성적 본능과 관련이 있다. 성욕은 동물과 큰 차이 없이 일시적이고 주기적인 충동으로 나타나지만, 감관대상이 자기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상상력이 증폭된다. 여기서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멸시하면서도 그 마음을 은폐하는 몸가짐, 즉 멸시에 대한 거리는 예의를 발생시킨다. 예의는 모든 진정한 사회성의 기본토대이며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만드는 출발점이다


이성의 세 번째 진보는 욕구대상과 직접 결합되어 있던 상태로부터 좀더 진행된 것이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의 목적을 위해 준비하는 미래에 대한 의식적 기대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본래 목적으로 파악하는 마지막 단계로 나아가며 존재물 전체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위한 것이며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목적론적 발상을 심화시킨다.

 

칸트에게 사회는 인간본성의 근원적 소질로부터 자유가 최초로 전개되는공간이다. 이 최초의 변화는 좋은 것으로의 진보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성이 미약하기 때문에 동물적 성질과 그 위력에 뒤섞이면서도 악도 생겨난다. 칸트는 악이 이익이고 선한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이기심과 반사회적 경향성 때문에 생기는 투쟁은 반사회적 악이지만, 오히려 사회성을 도출해내는 반사회적 사회성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악은 자연적 감정으로 뭉친 인간 사회를 도덕적 전체로 바꾸는 장치인 것이다. 반사회적 사회성의 사회적 발현물은 궁극적으로 이다


그러므로 사회성의 근본적 원리는 법과 법률체계로서 제도가 된다. 이렇게 형성된 보편적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칸트는 시민사회라 부른다. 칸트는 시민사회와 그것의 전 세계적 확장으로서 국제연합 및 세계시민 상태를 자연의 계획으로 설정하지만, 시민사회의 발생론적 전개나 경험적 실현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시민사회와 세계시민은 경험에서 도출되는 경험적 원리이기보다는 선험적 원리로 제시된 이념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실현 불가능 하다.

 

칸트는 철학자의 입장에서 신의 섭리를 비판하는 근대인답게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자연의 계획을 통해 논증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선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시작하며, 선을 실현하고 도덕을 개선하기 위해 반사회적 사회성이 요구되고, 처음부터 굽은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본성 때문에 보편적 세계시민 상태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점은 칸트가 변신론과 이성적 주체 사이를 오가면서 신을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간접적 동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7. 헤겔 사회계약론 비판과 자유실현으로서 인륜적 국가

 

헤겔은 개인과 사회 간에는 통일된 지평이 있으며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공동체적 존재로 태어난다고 본다. 헤겔의 이런 차원을 드러내는 개념이 바로 인륜성이다. 헤겔은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인격을 지닌다와 같은 주장을 사회계약론자처럼 당연하게 전제하지 않는다. 헤겔에게 자유와 인격의 의미는 인륜적 공동체의 삶 속에서 법적·도덕적 장치가 형성되고 작동하는 가운데서 분명해지고, 외적 장치를 통해 실천적으로 드러날 때 자유와 인격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유권과 인격권도 확립된다. 그런 과정이 바로 사회계약론자에게서 당연하게 전제되는 권리인 자유와 인격 자체의 정당성이 증명되는 과정이다.

 

헤겔에 따르면 권리도 계약도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실현된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의 총체적 지평으로서 공동체적 기반이 인륜성이다. 인륜성은 국가의 주요 지반이 되는 추상법과 도덕성의 통일이며, 법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의 통일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특수의지와 공동체의 보편의지가 법과 선을 매개로 통일된다. 헤겔은 이런 의미의 인륜성을 가족·시민사회·국가의 논리적 전개를 통해 정립하고 궁극적으로 인륜성을 국가법과 제도에 담겨 있는 국가의 정신이라고 본다


그래서 헤겔에게 훌륭한 개인, 훌륭한 시민은 좋은 법률을 가진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때 법의 출발점은 각 개인의 자유롭고 특수한 의지이며 그 정점은 개인의 특수의지와 공동체의 보편의지가 통일된 지접이다. 법의 체계는 보편의지로 실현되는 자유이념에 대한 모든 규정들의 체계이다. 그래서 자유는 법의 실체와 규정이며, 국가는 자유가 실현된 왕국이다. 국가 안에서 자유의 전개와 실현을 통해 정립되는 자유이념의 진리가 인륜성이다.

 

헤겔은 가족과 시민사회가 이미 국가 속에 있지만 국가는 단순히 전제된 것이라기보다는 가족과 시민사회의 한계를 지양하면서 그 계기들의 논증을 통해서 도출되고 증명된다는 점이다. 개인에게 국가는 전제이면서 결과이므로, 국가와 국가체제를 임의적으로 만드는 사회계약론자와 달리, 헤겔의 국가는 전제와 증명을 통해서 필연성과 보편성이 정립된 이성적인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국가와 국가정체를 신적인 것내지 항구적인 것이라 일컫기도 한다


권리와 의무가 분리되지 않는 헤겔의 국가도 사회계약론자처럼 삼권분립에 기초한다. 헤겔은 삼권을 입법권(헌법), 통치권(중간계층으로서 공직자), 군주권으로 분할하며, 군주권은 입헌군주제를 의미한다. 군주를 최정점에 놓는다 해도, 이것이 군주국으로의 후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군주는 이름만 군주이지 실제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최고 정치가로서 일종의 대통령과 다르지 않다.

 

한편 칸트는 시민사회를 공화국 또는 국가라고 하는데 반해 헤겔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구분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개인과 국가의 관계로 확장되며 역사철학의 문맥에서 보면 개인과 세계사의 관계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위해서는 정치적 국가와 법제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때 정치적인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이 헤겔의 국가관과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을 전개시키는 요인이 된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었다면그 결과물에 대한 합리적 파악도 가능하며, 그것을 다시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이론을 비판하는 맑스의 견해도, 헤겔적 국가공동체의 필연성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적 국가관과 역사관도 의미를 지니게 된다.

 

8. 원자적 개인과 공동체적 개인

 

개인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원하는 일을 스스로 자유롭게 수행한다. 그러나 자신과 상관 없어 보이는 일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가진다면 국가의 운명은 이미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고 루소는 말했다. 무관심은 공동체에 대해 영향력을 포기하는 것이며, 결국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포기이고 인격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의 공간이 어떠하든지 간에 개인은 이미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전체 없는 부분이 없듯이, 사회 없는 개인은 불가능 하다. 그래서 사회구성원의 존재목적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 및 공동체의 생존이다. 개인은 홀로 원자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 태어나므로 개인의 목적은 공동체의 목적에 의해 좌우된다.

 

여기에서 인간이 근본적으로사회적 동물이고 공동체적 개인이라고 주장할 정당성이 있는가? 근대 사회계약론자들은 개인의 독자성과 자유에 주목하면서 개인은 공동체적 개인이기보다는 사회 이전의 원자적 개인이며, 그의 원초적 상황은 자연 상태이다. 그래서 원자적 개인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하며, 형성된 사회는 보편적 사회인가 등의 문제를 제시한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도출하기 위해 사회계약론자는 무엇보다도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고, 특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으로 간주하며 자기이익을 관철시키는 이기성에 주목한다.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고 권리를 확립하는 자유를 지니며, 타인도 그러하다. 그러나 욕구와 의지에는 차이가 있으며, 차이는 개인의 욕구를 특수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그에 반해 사회는 모든 개인에게 관철되는 보편적 의지와 보편적 목적을 지향한다. 개인의 특수성과 사회의 보편성의 매개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가늠하는 잣대이지만, 양자는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2012년 12월 작성


 



서양 근대철학의 흐름

 

 

<목 차>

 

1. 서양 근대철학의 성립 배경


1) 유명론

2) 새로운 우주관

3) ‘개념의 발견

4) 수학적 방법 도입

 

2. 데카르트


1) 서양 근대철학의 시작

2) 데카르트의 등장

3) 직관과 연역

4) 1원칙과 신 존재 증명

5) 심신 이원론

6) 자아

 

3. 경험론


1) 경험론의 시작

2) 로크

3) 버클리

4.

 

5. 비판적 고찰


1)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명제는 과연 맞는 말일까?

2) 자아의 존재





 

1. 서양 근대철학의 성립 배경

 

1) 유명론


유명론(nominalism)이라는 용어는 보편은 명칭이다라는 표현에서 온 것으로, 플라톤-기독교적 실재론(realism)에 상대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로스켈리누스와 아벨라르, 오컴 등의 유명론자들은 보편개념은 실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개별자(구체적 사물)일 뿐이며, 보편개념은 단지 개별자들로부터 감각적 경험의 종합과 추상을 통해 얻어진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윌리엄 오컴은 단호하게 개별자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관념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가리키는 표상들이 있다 하더라도, 개별자의 보편성은 그 실체 속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상징으로만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학적 측면에서 유명론은, 중세적 세계관을 완전히 와해시키고, 형이상학적 측면으로는 플라톤 이래 서양의 철학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이데아적 실재론을 분쇄한 것이었다. 유명론은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제공하여 이후 경험론자와 실증주의자의 옹호를 받는다.


또한 개별자를 강조함으로써 유명론은 한편으로 중세의 교권적 체계를 부수었고, 다른 한편으로 신앙의 근거를 내면과 계시의 세계로 옮겨 놓았으며 지상세계를 개별자에게 돌려주었다. 보편개념은 신성불가침한 천상적 소산이라기보다 단지 우리 정신작용의 소산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신은 우리의 추론에서 얻어지는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이성의 발견이었다


철학이 더 이상 신학의 시녀가 아니게 되었고, 신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며 오로지 의지로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파악되었다.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관념적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데서 신은 존재론에서 인식론적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2) 새로운 우주관


르네상스 시기에 새로운 우주관이 등장했다. 바로 무한하고 동질적인 우주였다. 기존의 중세 스콜라적 우주관과 달리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세계가 주변도 중심도 없으며, 따라서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하나의 운동하는 행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구를 수많은 별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다른 별들과 마찬가지로 원형 궤도를 그린다고 봄으로써, 원리상 프톨레마이오스에 근거한 중세적인 우주론을 붕괴시켰으며 뒷날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재확인된 태양 중심적 세계관을 개진하였다.

 

덧붙여 그는 만물의 위치는 신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우주관에 의해서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방법으로 양적으로 탐구되어야만 하는 동일한 자연법칙들이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타당하게 되었다. 니콜라우스의 우주론적 상대성 원리는 스콜라적 세계관에 반하여 모든 유한자는 무한자와 동일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명제를 정립했다


모든 유한한 것은 무한자를 계측할 수 없다. 이렇게 되어 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오성과 이성의 문제에서 가슴과 심정의 문제로 옮겨가고 교회의 권위는 끝없이 전락하면서, 신앙은 급격히 신비주의적 색채와 경련적이고 표현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코페르니쿠스와 조르다노 브루노의 지동설은 실증적으로 물리학적 증거를 제시하며 새로운 우주관을 확립했다. 우주공간의 적극적인 무한성이라는 개념과 지동설의 개념이 새로 결합되면서, 종래의 신 중심적인 목적론에 대해 조화라고 하는 내재적인 목적론을 불러들여 범신론적·생명적 우주 개념을 확립시켰다.


이제 무한한 공간 어디에도 절대적인 중심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우주가 전적으로 평등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의 위계적 서열이 무너졌다는 말이다. 천상적 세계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세 까지 인간은 신에게 복종함과 지상에서 영광됨을 동시에 지녔다. 그러나 새롭게 이해된 신은 우주의 이성으로는 해명할 수도 복종할 수도 없는 숨은 신이었다. 신은 하나의 초월적 원인으로, 다시 말해 세계의 밖에서 세계의 운행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내부에서 우주가 운행되는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목적론이라는 외재적 철학을 대신하여 조화라고 하는 내재적 원칙이 상정되었다. 이것은 자연 현상의 이면에 영적인 활동이 있음을 인정하는 물활론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상은 일정한 구조를 가지는 전체로서의 질서를 지니지는 못했다. 자연철학자들은 시종일관 우주가 생성하고 발전하는 혼돈된 모습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했고, 자연 현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지닌 본질적 관념에 집착했다. 자연 세계에 대해 관심이 증가한 것은 르네상스가 전개되면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었지만, 그것에 대한 인식과 묘사는 스콜라 철학적인 것이었다.

 

3) ‘개념의 발견

 

케플러는 르네상스 철학에서 근대 철학을 이행하는 시기에 위치하는 과도적인 과학자였다. 그의 세계관적 특징은 한편으로 르네상스 시기 철학과 같은 관념적 범신론이다. 그에게는 조화의 개념이 세계 법칙적 질서의 사상을 내포하는 철학적 중심개념이 된다. 인간은 이 조화로운 우주에 편입되어 있으며, 조화로운 비례 관계를 인식하고 이를 도덕적 완성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인 작업은 무엇보다도 조화로운 우주의 아름다움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곧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의 이데아에 우주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셈이다.


그러나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와 그 속도 사이에 관련성이 있음을 통찰했을 때, 그는 갑자기 근대 철학에 한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영혼이라는 사상과 개념(물활론)은 작용원리로 우주에 적용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새로운 작용원리로 힘이라는 개념이 요구되었다. 자연에는 오직 힘들만이 작용하며, 세계의 구조는 생명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신적인 시계장치만이 남게 된다


그는 힘이라는 개념과 영혼이라는 개념을 분리시키고 힘을 개별적 물체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두 물체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함으로써, 본질적인 점에서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물활론적이고 유기체론적인 견해를 극복하고 물질적 결정성이라는 관점에서 자연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당대의 천문학과 물리학에서 여전히 지배적이던 엔텔레케이아와 목적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들을 넘어선 것이다.

 

 

4) 수학적 방법 도입


케플러의 우주에서 수학적 조화라는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자연인식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하는데 성공하여 과학을 근대적인 방향으로 크게 전진시킨 사람이 갈릴레이였다. 그는 경험적 사실을 관찰하거나 실험하는데 수학적·계량적 방법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방법적으로 근대 과학의 획기성을 보여준다. 곧 사물 간의 관계를 양적으로 파악하여 그들 사이의 인과 관계를 수학적 법칙으로 표현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스콜라적 형상 또는 이데아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추방한다. 그가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라고 본 것은 자연에 대해 묻고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하는 실험이었다.

 

갈릴레이는 자연에 대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관찰이라는 경험적 요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자연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이론을 개입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이 수학에 대한 그의 철학적 입장이다.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이 언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던 것이다


그는 근대 과학의 방법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우주를 지배하는 수량적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 자연을 연구하는데 유일한 대상이 되었다. 물체의 운동과 변화도 완전히 수량적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에,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하는 것을 가지고 변화를 목적론적으로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은 당연히 거부되었다.

 

2. 데카르트

 

1) 서양 근대철학의 시작

 

서양근대철학의 시초는 베이컨과 데카르트이다. 베이컨은 중세의 사고방식인 믿는 것이 힘이다.” 대신 아는 것이 힘이다.”를 들고 나왔고, 데카르트는 창조된 것이 존재다.”가 아닌 사유가 곧 존재다.”를 주장했다. 둘의 공통점은 신 중심 사고에서 인간 중심 사고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지식, 사유가 인간의 본질이며, 근대적 이성이 깨어나고 도구적 합리성을 가지고 자연을 극복하고 개척해나가는 게 인간이다. 이런 면에서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근대 서구적 사고의 기틀을 만든 인물들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서양인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들 때문이다.

 

베이컨은 영국의 경험론자로 경험에는 유용한 경험과 유용하지 않은 경험이 있다고 바라보았는데, 그는 유용하지 않은 경험의 원인인 선입견이나 편견 즉 우상(Idols)을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귀납적 방법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 선입견과 편견을 벗겨내면 비로소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서 나오는 베이컨의 4대 우상론은 미신, 교황의 권위, 장원적 사고, 성경에 대한 맹신과 같은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핵심이다. 베이컨이 철학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는 없지만,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나 근대적 사고를 열었다는 점에서 베이컨 이전과 이후로 근대 철학은 나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2) 데카르트의 등장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또한 대륙 합리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물리적 인과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라는 동시대의 우주관을 공유하면서, 여기에 철학적 기초와 포괄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이 사물을 계시적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 이성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방법적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서 자연의 세계 전체가 인과의 법칙에 따르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체계라고 하는, 이른바 기계론적 자연관이 성립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신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인간 이성에 기초에 설명하고자 했고, 그 인간 이성은 수학적 원리였다. 그는 신학의 시녀로 불리며 지위가 바닥에 떨어진 철학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성적 원리들을 분명히 세우고 거기에서부터 세계에 대한 지식을 연역해내고자 했다. 그러나 모든 연역은 전제를 요구한다. 이것은 마치 유클리드의 기하학 체계가 몇 개의 공리와 공준에서부터 연역되어 나온 것과 같다.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인간 정신의 이성적 능력이 인간과 세계에 관한 최초의 출발점이며 진리의 원천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계시는 심정과 신앙의 문제이지, 지성적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이것으로 지상 세계를 물활론적이고 신비주의적 관념으로 해명하는 것을 물리치는 한편, 올바르게 인도되는 인간의 이성이 적절한 방법에 따라 우주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몽테뉴 식의 고대적 회의주의도 물리친다. 데카르트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청산하고 우주의 질서를 기계론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인간 정신과 그 지적 확실성의 기초를 정립하는 완전히 새로운 철학을 구성하기로 결심했다.

 

3) 직관과 연역

 

데카르트는 수학적 출발점, 곧 공리의 자명성은 직관에 있다고 생각하여, 직관과 연역의 힘에 의해 우리는 착각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물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직관과 연역을 구사할 수 있는 인간적 역량을 확신했다. 이것은 곧 잘 판단하고 참된 것을 거짓으로부터 구분해내는 역량, 이것을 원래의 양식이라든가 이성이라고 부르며


이것은 또한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똑같은 법임을 입증한다고 보았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나누어 가진 이성을 확신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이며, 그의 저서 방법서설의 서두는 이성의 권리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이 이성을 단련하고 정련하는데 집중되었으며, 수학은 이것을 위한 가장 뛰어난 모범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우리의 정신이 관념을 명석판명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관념이 경험에서 형성된다는 경험론의 가설과는 출발을 달리 한다. 오히려 우리의 경험이 관념에 대응한다고 보았다. 곧 수학적으로 추리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질서정연하게 나아감으로써 우리가 모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3482+41257의 계산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계산의 답을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수학이 지니는 추리의 확실성과 명증성이 그를 수학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직관과 연역이라는 기초 위에 지식의 거대한 체계를 세운다. 이들 두 방법만이 지식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 다른 어떤 방법도 오류를 범하기 쉽고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직관은 맑고 빈틈없는 정신이며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제공하는 정신활동이다. 또한 선명한 개념뿐만 아니라, 실재에 관한 진리도 제시한다. 연역은 직관에 의해 확실하게 파악된 사실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추론들이다. 직관과 연역은 동시에 모두 진리를 포함한다. 직관에 의해 우리는 직접적으로 완벽하고 단순한 진리를 포착하며, 연역에 의해 우리는 정신의 연속적인 추론으로 진리를 파악해 간다.

 

데카르트는 이전의 추론방식이 그저 형식 논리적인 것이어서 개념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반면 진리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죽은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연역법에 확실하게 알려진 하나의 사실에서 그 사실이 내포하는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의 사실로부터 추론하는 것과 하나의 전제로부터 추론하는 것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우리는 하나의 전제로부터 오류 없이 추론할 수 있지만, 그 결론의 진리값은 전제의 진리값에 종속된다. 데카르트가 이전의 철학과 신학을 거부한 이유는, 참이 아니거나 단지 권위에 기반한 전제로부터 삼단논법의 방법으로 결론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지식이 개인 자신의 정신 속에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진 기초 위에 쌓아지기를 원했다. 또한 데카르트는 직관과 연역을 위해 규칙을 정한다. 바로 명증, 분석, 종합, 열거의 네 가지 규칙이 그것이다.

 

4) 1원칙과 신 존재 증명


그는 철학적 체계를 정립시킬 새로운 제1원칙을 찾아 나선다.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하나의 진리가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철학에서 마치 수학의 공리 같은 것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찾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회의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의심, 즉 회의한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고 사유하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어떤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때 주체는 물리적 성질을 가진 존재가 아닌 관념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사유하는 실체는 그 존재를 위해 장소도 물질적 사물도 그 근거로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사실에 의해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편, 자아의 본질도 규정해나간다. 어떠한 사유도 그 행위자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나의 존재는 확증되고, 나의 존재는 사유에 의해서 보증되므로 철두철미하게 관념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제 확증된 자기 자신의 존재와 방법에서 확립시켜 놓은 명석판명한 사유양식을 수단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는 이 증명을 이중으로 행한다. 먼저 인과론적 증명은 자신의 불완전성이 완전한 존재자에 대한 관념의 기원일 수는 없으므로 신의 존재라는 사실은 자기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볼 때 무에서는 무엇도 나올 수 없으며, 더 완전한 것이 덜 완전한 것으로부터 나올 수도 없다. 결국 원인 속에 결과가 내포되어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매우 명석판명하게 판단했을 때 완전함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관념은 객관적인 실재이다. 그런데 그러한 완전함이 내 불완전함의 소산일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데카르트는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에 대한 관념이 외부로부터, 다시 말해 완전한 존재인 신으로부터 그의 마음에 심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증명은 존재론적증명이다. 이것은 신의 관념이 내포하고 있는 속성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관념을 명석판명하게 인식할 경우 우리는 곧바로 그 속성을 인식한다. 예를 들면 삼각형이라는 관념을 명석판명하게 떠올릴 경우, 세 변과 세 각을 지니며 두 변의 합이 나머지 한 변의 길이보다 긴 도형이라는 속성이 곧바로 떠오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의 관념도 속성들을 내포하며, 특히 존재의 속성을 내포한다. 신의 관념은 완전성이라는 속성을 지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완전할 수는 없으므로, 완전성이라는 속성은 당연히 존재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생각해낼 수는 없다. 이렇게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낸다.

 

5) 심신 이원론

 

신의 존재가 증명된 이상, 기만자 또는 악령이 나로 하여금 잘못되게 인식하도록 끊임없이 기만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만하는 존재가 완전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완전한 존재자인 신이 끊임없이 나를 속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른바 연장된(extended) 실체라는 물리적 대상에 대해 명석판명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물을 감각해보려고 의지를 갖는다 하더라도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감각할 수는 없고, 또 어떤 것을 감각하지 않으려 해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감각이 생긴다. 그렇다면 물질적 대상에 대한 인식이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될 수는 없다


신은 결코 기만자는 아니므로 신 자신이 직접 그러한 관념을 나에게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신은 성실할 터이므로, 내가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로 존재하는 사물이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인식과 신의 존재라는 전제로부터 외부 대상의 존재를 증명해낸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은 분리된다. 정신은 사유하는 것에 의해서만, 곧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고, 물체는 정신과 관련 없이 연장함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은 전적으로 비연장적인 사유를 본성으로 하는 실체이고, 물체는 정신적 성질을 전혀 가지지 않는 단지 연장만을 본성으로 하는 실체라는 것이 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이원론은 단순히 사유의 순수성과 독자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연으로부터 모든 영적 또는 정신적 활동이 배제되어 자연을 순수하게 기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질은 곧 연장이다라는 새로운 세계관은 자연에서 모든 심리적 성질을 구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적 자연관, 곧 엔텔레케이아적 사상이나 목적론적 사상을 철저하게 타파하는 동시에, 르네상스 시기 자연철학자들의 물활론적 우주관까지 극복해냈다.

 

6) 자아

 

데카르트 철학은 지식의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주관의 정신 위에 놓은 것으로, 당시까지 유례없는 것이었다. 그는 신 대신에 자아를 우주의 중심에 가져다 놓고, 이것을 기원으로 하여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을 유출시킨다. 데카르트적 자아는 회의함으로써 정련되고 추상화된 인식의 주체이다. 자아가 기술적 주체로 서게 되면서 주관은 신비가 걷힌 지상 세계를 능동적으로 지배하고 조작해나갈 수 있게 된다. 정신이 세계를 대상으로 표상함으로써, 그 정신은 이것을 자유로이 조작할 수 있는 기계론적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 정신은 그것을 자기 주위의 새로운 현실로 만들어 나간다. 자연은 단지 기계론적 합리주의에 의해 인식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기계화할 수 있는 실현 대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근대의 커다란 특징은 바로 이처럼 자아의식이 점증하고 세계가 대상화되는 것이다.

 

 

3. 경험론

 

1) 경험론의 시작

 

로크는 우리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경험에 의해 제약 받는다고 말한다. 로크 이전의 경험론자들은 인간 이성의 역량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는 올바른 방법을 도입한다면 인간의 이성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 데카르트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로크를 비롯한 영국 경험론자들은 과연 인간 정신이 우주의 참다운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이 경험론은 세계관적 편향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경험적 인식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입장에 섰을 때, 곧 경험이 객관적 실재를 매개한다는 입장에 설 때 그것은 유물론적 경험론으로서, 외부 세계의 존재와 그 실체의 객관성을 믿는 베이컨이나 로크가 여기에 속한다. 이에 반해 관념론적 경험론은 객관적 실재가 감각들의 복합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경험은 결코 객관적 인식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런저런 형식을 띤 주관적인 어떤 것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버클리와 흄이 이러한 인식론에 속한다.

 

2) 로크


로크는 윌리엄 오컴이 한 것처럼 보편개념의 문제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우선 지식이 관념에 기초한다고 봄으로써 전통적인 철학적 입장을 수용하지만, 그 관념을 획득하는 인간의 정신적 경로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으나, 로크의 관념은 그 기원을 경험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입장을 전혀 달리 한다. 관념은 기원은 경험이다. 경험은 감각과 반성을 통해 관념을 형성한다


우리는 감각에 의해 외부 세계를 경험하고, 이 감각 인식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우리 내부의 경험, 곧 관념을 형성하고 조합하는 데 이른다. 로크에게 중요한 것은 감각 없이는 반성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신작용은 관념이 공급되었을 때 시작하며, 이 관념들은 감각을 통해 외부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이 그의 타불라 라사로서 플라톤으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ᄁᆞ지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여지던 생득관념론, 곧 사람은 이미 정신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관념의 집합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는 생각을 파괴해 나간다.

 

로크가 부정하는 것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의 확실성이 아니라 이러한 관념이 생득적이라는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원리들이 확실한 것은 그것들이 생득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이 사물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확실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로크는 그의 저서인 인간 오성론에서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지니는 관념들 대부분의 출처라고 주장한다


감각을 통해서 정신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순관념이다. 이에 비해 복합관념은 수동적이지 않고, 그것을 구성하는 데는 정신이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정신은 여러 단순관념들을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하며 추상하기도 한다.

 

만약 감각 인식이 우리 지식의 근원이라면, 그 감각 인식을 발생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곧 인식대상의 문제가 남는다. 로크는 인식의 기원을 우리의 정신에 관념을 생성시키는 대상의 내재된 힘이라 정의한다. 로크는 이것을 제1성질과 제2성질로 나누는데, 1성질은 실제로 물체 그 자체에 내재된 성질이다. 따라서 제1성질에 의해 생성된 관념들은 그 대상에 내재된 성질을 닮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과는 실제로 둥글다는 것이다. 1성질은 입체성, 연장, 생김새, 운동, 수 등을 말한다. 이에 반해 제2성질은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관념이다. 우리는 사과에서 붉은 색을 보지만 그것은 사과 속에 내재된 성질이라기보다 사과 속에 있는 어떤 관념을 창출시키는 힘이라는 것이다. 곧 제2성질은 색이나 소리, 맛이나 향기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 성질들은 어떤 실체에 의존한다.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는 가정 없이는 우리는 어떤 성질들의 관념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로크는 감각은 실체에 의해 비롯된다.”고 말함으로써 감각의 개념으로 실체를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념에 규칙성과 일관성을 부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실체이고, 감각적인 지식의 대상이 되는 것도 실체라고 한다.

 

3) 버클리

 

버클리는 로크가 실체의 존재를 가정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로크에게 실체는 정신에 의존하지 않는 고유한 물질이었다. 그러나 버클리에게는 실체가 정신에 의존하거나, 정신 이외에 다른 실체는 없거나 둘 중 하나다. 그는 신 시각론에서 우리의 모든 지식이 실제로 느끼는 시각과 그 밖의 감각 경험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공간이나 크기 같은 것을 직접적으로는 감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물들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단지 그 사물들에 대한 여러 가지 시지각만을 가질 뿐이다


버클리는 실체나 공간의 관념이 지각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며 그의 철학체계를 이루는 근본명제인 존재란 지각된다는 것이다를 주장한다. 이리하여 사물은 그것을 지각하는 정신이나 사유하는 존재 외부에서 독립적 존재를 갖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떠올리는 것들은 마음속에 형성한 그것에 대한 관념이지, 그것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지각을 가질 수 없는 영역 밖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론에 기초하여 버클리는 로크의 실체개념을 공격한다. 절대적 존재는 사유하는 그 주체일 수는 있어도, 사유되는 대상은 그 사유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그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단지 감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지각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결국 그가 부정하는 것은 우리 사유의 대상으로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인 것이다


실체는 추상관념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실체는 감각 인식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 중력, 인과율 등의 개념들은 우리의 정신이 감각 경험으로 얻어낸 관념 이상의 것이 아니고, 또한 그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버클리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한계를 지어주는 것과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물들은 내 정신의 외부에 존재를 가진다. 왜냐하면 나는 경험에 의해 사물들이 나의 정신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들을 지각하는 시간 사이에 간격이 있을 때에도 그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정신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물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의 규율에 따라 그 사물들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게 하는 전지전능한 영원한 정신이 존재한다.” 이렇게 되어 사물들의 존재는 신의 존재에 귀속되며 신은 곧 자연에 있는 사물들이 질서를 갖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대상들을 지각하지 않을 때에도 대상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신이 계속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는 인간 정신이 인과율에 대해 통찰할 수 있음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우리의 감각 자료에서 인과율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결국 인과율은 신의 관념으로부터 온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철학적 유물론과 종교적 회의주의를 붕괴시키고자 했던 버클리 철학 전체의 근본적 동기이자 목적이었다. 그의 경험론은 인간정신은 언제나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에만 대응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아는 추상관념이란 이렇나 경험들로부터 추론된 것으로서 어떤 대응하는 실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이 흄을 통해 현대 철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4.

 

철학사에서 흄은 흔히 로크로부터 시작하여 버클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온 철학적 흐름을 완성시킨 철학자로 언급 된다. 이 흐름의 주제는 인간은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 말고는 세계에 관하여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주요한 논지는 로크가 말하듯이 경험은 감각과 반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음의 작용은 오직 감각 인식에 주어진 물질에만 향하고 있으며, 물질은 색, 촉감, 소리, , 맛 같은 원자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흄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 어떤 힘이나 신에게 위촉받은 마음의 작용등은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서로 다른 사건들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이란 있을 수 없으며, 남는 것은 외부의 대상을 지니지 않고 또 그것이 속할 지속적 주체도 지니지 않은 채 흘러가 버리는 지각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문제이며,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척도라고 보았다.

 

흄은 마음에 제공되는 물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개의 범주로 구분되는 지각으로 이루어진다고 답한다. 정신의 내용은 감각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제시된 물질들로 환원될 수 있으며, 그러한 물질을 그는 지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지각이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갖는 것이며, 사유에서 최초의 재료는 인상이고, 관념은 이것을 모사한 것이다. 그 둘의 차이는 단지 생생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각할 때 최초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인상들은 생생하며 선명한 인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인상들에 대해 반성할 때 우리는 인상에 대한 관념을 가지며, 그 관념들은 원래의 인상보다 덜 생생한 일종의 영상이 되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하나의 인상이지만, 이 고통에 대한 기억은 하나의 관념이다. 인상과 그것에 대응하는 관념들은 모든 면에서 비슷하고, 그 차이는 단지 생생함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상이 없이는 관념이 있을 수 없다. 한 관념이 단순히 인상을 모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당연히 모든 관념에 대해 선행하는 인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상의 동물 같은 인상 없는 관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관념들은 감각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제공되는 인상들을 혼합, 전치, 축소함으로써 얻어지는 허구물이라고 한다.

 

단순한 관념들이 연합하여 복합관념을 이룬다. 흄은 단순관념들을 묶어주는 어떤 일반적인 원리들이 있으며, 그 원리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영향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그것들은 유사의 법칙, ·공간에서의 접근의 법칙, 그리고 인과율의 법칙이다. 흄은 이 중에서 인과의 개념이 지식에 대한 신념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동시에 모든 과학이 근거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라고 보고 그 본질을 캐나간다.

 

그러나 그에게 인과율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그의 감각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경험, 곧 특정한 사건들의 연속이 관습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점에 기초한다. 곧 그는 인과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을 부정하는 것이다. 흄은 먼저 인과율의 관념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그 기원을 찾는데,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과율의 관념이 어떤 인상을 모사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추론 가능하다고 믿는 어떠한 이성적 과정이 있다면 그것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정신 속에 인과율의 관념이 생기는 것은 어떤 동기에 의한 것일까. 여기에 대한 흄의 통찰은 유명하다. 인과율의 관념은 우리가 대상들 간의 어떤 관계를 경험할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연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흄은 인과율이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 속의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예증에 관한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정신 속에 생겨나는 연상의 습관이라고 본다. 인과율은 모든 인간적 지식의 중심이므로 이 원리에 대해 공격하는 것은 우리 지식의 확실성을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흄은 물체나 사물이 우리의 외부에 지속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를 가진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말할 어떤 합리적인 정당성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관념들이란 인상의 모사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모두 인상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상은 우리 내부의 주관적 상태일 뿐 외부 실재에 대한 분명한 증명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은 사물들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감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것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감각할 때마저도 우리는 단지 인상만을 얻을 뿐이지 인상과 구분되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외부 사물의 존재를 믿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흄은 이러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상상이 인상의 두 가지 특성을 다룰 때 생기는 산물이라고 한다. 인상에서 우리의 상상은 항상성일관성을 배운다. 계기적인 인상들 사이의 밀접한 닮음,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서 동일한 내적 닮음을 나타내는 일련의 구성요소들과 그 인상들의 분명하고 항상적인 공간적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인상들을 서로 동일시하도록 이끌며 실제 그것들 사시에 나타나는 중단을 무시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것들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흄이 대상 또는 지각이라고 무차별적으로 말한 하나의 지속적인 사물로 대치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흄은 어떤 사물이 지각되지 않고 존속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며, 따라서 중단된 지각들이 동일할 수 있다는 것도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지각이 지속적인 존재를 가진다면 지각도 판명한 존재를 가지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흄은 지각이 판명한 존재를 갖지 않음을 경험에 의해 정당하게 추리한다. 만약 지각이 판명하다면 환각의 문제가 있게 된다.

 

그는 항상성이라는 현상이 상상을 자극하여 인상들을 지속적인 대상들로 바꾸게 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항상성이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관성이 첨가된다. 이러한 이유로 상상에 의해 우리는 어떤 사물들이 우리 외부에 독립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지 합리적 논증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상이 사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가정은 추론 상 어떠한 근거도 없기때문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근거 아래 흄은 전통적으로 인격의 동일성으로 정의돼온 자아에 대해 탐구해 나간다. 흄이 마음의 동일성이 허구적이라고 할 때, 그는 진정한 동일성, 곧 하나의 단일하고 불변하는 존재로서 동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각들 사이의 관계로 분석될 수 있는 동일성은 인정한다


흄은 진정한 동일성이라는 의미의 자아라는 관념은 우리에게 없다고 한다. 우리의 지속적인 동일성에 대해 인상을 주는 것은 기억의 힘이다. 흄은 정신을 여러 지각들이 계속적으로 그들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극장에 비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연극이 상연되는 무대에 대해 어떤 특정한 관념을 갖지 않을 뿐이다. 만약 자아가 축적된 지각이라고 한다면 그 지각들은 어떻게 축적되는 것일까? 우리의 지각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들을 연결시켜 기억 속에 침전시킬 무엇인가가 없다면, 흄이 말한 느슨한 동질적 자아조차 형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인식의 통일적 구성으로서의 자아를 말하며 발전시킨다.

 

흄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 본성 그 자체가 인간 경험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식론의 가장 중요한 문제, 곧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데카르트로부터 한 세기 뒤에 흄은 데카르트의 질문에 답변하느라 애쓰기보다는 그 질문 자체의 중심을 이동시킨다


중요한 것은 확실성의 개념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확실한 지식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치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발견할 수는 없고, 단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인식의 도구, 곧 인간 마음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밝힐 수 있다는 것이 흄의 신념이었다.

 

흄은 로크와 버클리가 구성한 경험론적 입장을 공유하면서 한편으로 어떤 경험론자도 이르지 못하는 영역까지 그의 철학을 밀고 나간다. 그가 모든 관념이란 인식으로부터 마음에 이른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철학이 로크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흄은 관념들이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전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우리의 습관적인 신념이 무엇을 말하든 간에 관념에 대한 경험론적 설명이 규정짓는 지식의 한계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험론적 전제로부터 가차 없이 밀고나가 현대적 분위기로 물든 새로운 회의주의를 대두시키는 것이다. 쾌감과 불쾌감을 포함하는 우리의 오감이야말로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관념의 유일한 근원이므로, 감각 인식으로 추적될 수 없는 모든 관념은 허구적인 것이다.

 

흄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양식을 보여준, 그의 세대 고유의 낙천주의를 공유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사유의 구조를 탐구하기 시작하자마자 과학적 방법에 대해 그가 지니고 있던 낙천주의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흄은 관념이 인간의 정신 속에 형성되는 과정을 밝혀가다가, 인간의 사고 범위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가를 발견하고 아연 한다. 그리하여 초기 시절에 이성에 보내던 신뢰는 결국 회의주의로 바뀐다


그러나 과학혁명과 흄의 철학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출발점은 과학적 법칙에 대한 신념이었고, 그의 결론은 과학적 법칙에 대한 전면적 회의라고 요약되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적 법칙이 미리 전제하는 인과율이야말로 흄이 관심을 기울인 주제이고, 또 그것에 대해 논박한 것이야말로 흄의 독창성이 빛나는 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흄이 공격한 것은 자연과학적 법칙이 아니라 거기에 부여하는 우리의 신념이었다. 그는 어떤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필연적이고 선험적인 것으로 묶어줄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17세기가 바야흐로 시대적 발견으로 자신만만해할 때, 흄은 이 모든 발견과 법칙을 받치고 있던 인식론적 토대를 여지없이 부순 것이다. 칸트가 자신의 독단의 잠이 흄에 의해 깨워졌다고 하면서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과학 이성을 굳센 기초 위에 놓으려 한 것은, 이처럼 흄이 인과율의 필연적인 연결을 분쇄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모든 형이상학적 독단에 대한 혐오, 종교적 권위에 대한 의심, 지성이 알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기보다 그 한계를 설정하는 데 기울인 관심, 상대주의적 윤리학의 옹호 등에서 흄은 계몽주의의 이념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부터 한 사람의 선도적 계몽 철학자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철학이 난해한 철학과 형이상학적 허튼 소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한다.

 

5. 비판적 고찰

 

서양 근대철학은 크게 보면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합리론과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론으로 나눌 수 있다. 데카르트와 흄의 철학은 모두 회의에서 시작했지만 결론은 다르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몇 개의 자명한 진리를 도출하여 지식을 얻어 나간다. 그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흄은 우리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합리적 추론이라기보다는 자연적 반응으로 이해한다. 거기에 필연성 같은 것은 없다. 결론적으로 절대적인 진리는 인식 불가능 하다는 회의주의적 입장이다. 후대의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준 이 두 철학자의 입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여기서는 두 사람의 철학을 두 가지의 주제로 비교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명제는 과연 맞는 말일까?

 

데카르트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석판명하게 떠오르는 것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에 대해 문법의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려면 생각한다라는 말의 주어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한다의 주어인 는 존재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거기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사를 사용하려면 주어가 있어야 한다는 문법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오히려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 무엇은 권력의지를 말한다.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고 있다. 무아(無我), 무심(無心)을 이야기 하지만 역설적으로 마음을 비우자는 생각은 하고 있다. 다만 그 생각이 정말로 나에게서 나오는 것인지 다른 무언가에 의해 나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해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원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도 기존에 나에게 지각되어 내 머리 속 어딘가에 저장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언가 재료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생각의 기원은 우리가 지각하거나 지각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며


결국 그 지각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각한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그토록 확신했던 제 1 원칙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여기에서 출발한 그의 모든 이론은 시작부터 부정되며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영국의 경험론자 흄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2) 자아의 존재


흄은 인간이 합리적이란 근대적인 인간의 본질에 문제를 삼았으며, 따라서 그는 이성의 활동을 자신의 주장에서 지극히 제한시킨다. 그는 인간의 모든 이성 활동은 지각 활동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들었을 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여러 이성의 판단들은 이전에 경험해봤던 것들의 사고이다. 눈이 먼 장님은 일전에 하얀색을 본 적이 없다면 하얀색에 대한 사고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내 곧 흄은 지각수용이 없는 이성의 활동은 존재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데카르트는 모든 활동의 원천을 이성으로 규정한 반면, 흄은 모든 활동의 원천을 지각, 경험으로 보았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자아를 살펴본다. 관념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내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관념이 정말로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관념이 생기지 않는다. 외부에 무언가 있을 때만 관념이 떠오른다. 가령 23482+11457이라는 계산도 그 계산이 있어야만 우리가 지각하여 34939라는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에서는 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관념의 출발은 외부의 무언가이며 그것을 지각할 때만 관념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아는 지각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흄의 주장은 유효하다.


데카르트는 신 대신에 자아를 우주의 중심에 가져다 놓고, 이것을 기원으로 하여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을 유출시킨다. 그러나 외부의 무언가가 없으면 지각할 수 없으며 그 지각이 모인 다발이 자아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자아는 외부의 무언가에 종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장된 실체에 대한 관념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관념은 외부의 무언가에 의해 온다. 데카르트는 자아를 모든 인식의 출처로 정의했지만 자아 자체가 그러한 주체적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자아가 흄의 주장처럼 지각의 다발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외부에 종속된 존재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자아는 우주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게 된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주장은 흄에 의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참고문헌>

 

조중걸, 열정적 고전 읽기, 프로네시스, 2006

서양근대철학회, 서양근대철학의 열가지 쟁점, 창비, 2006

 

2012년 12월 작성


 



한비자 사상 요약(어디서 퍼온 건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김원중 역 한비자에 있는 내용같다.)


한비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사회적 요구를 정확히 파악해 이에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비는 역사란 진화하므로 문제가 발견되면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순응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상앙이 주장한 ‘법’은 백성들의 개인적인 이익 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신불해의 ‘술’은 신하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비판을 그들의 행동과 일치하게 하는 기술로서, 신하들을 잘 조종해 군주의 자리를 더욱 굳건히 하는 인사 정책을 말한다. 신도의 ‘세’는 군주만이 가지는 배타적이고 유일한 권세를 말한다.


한비에게 있어서 법이란 군주가 공포하면 지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행위 준칙이다. 또한 이 법은 군주의 통치 도구이며 전제법이다. 군주는 법률을 제정하고 법에 따라 신하와 백성을 다스리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법은 만인에게 두루 적용되지만 군주는 법률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봉건 사회에서는 “예는 일반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형벌은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유가의 관점보다 한 발 더 앞선 것이다. 결국 법은 지배층과 일반 백성 사이의 불평등 관계를 반영하고 군주의 지위를 강화시킨다. 이렇게 볼 때, 한비가 주장하는 법이란 겉으로는 군주와 신하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함께 준수해야 하는 법칙이지만, 실제로는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한비는 법을 제정할 때는 몇 가지 원칙을 고려해야 된다고 제시했다. 첫째, 공리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시세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셋째,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넷째,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과 감정에 들어맞아야 한다. 다섯째, 분명하고 명확해야 한다. 여섯째, 상은 두텁게 하고 벌은 엄중하게 해야 한다. 


법가의 기본입장은 기존의 예는 느슨한 상태의 규범이고 평등하지 않게 적용된다고 바라보았다. 반면 법은 만민 앞에 평등하고 왕자도 범법하면 인민과 동일한 처분을 받는다 하였다. 예의에 어긋난다고 해서 벌을 받지는 않지만 법을 어길 때는 벌을 받는다. 또한 봉건제, 정전제 폐지를 주장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각 지방에 관료를 파견하여 전국을 통치하고자 했다.  


그가 군주의 권세를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백성들의 행동을 살펴, 법을 준수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어긴 자에게는 벌을 내리기 위해서는 권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세가 있으면 설령 재능이 부족학 현명하지 못할지라도 현명한 사람들까지 굴복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법과 권세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한비가 말하는 ‘술’이란 임무에 따라 벼슬을 주고 명목에 따라 내용을 따지며, 죽이고 살리는 실권을 다투고 여러 신하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방법이며, 군주가 신하들을 다스리는 통치 수단이다. 그가 말하는 ‘술’은 ‘법’과는 달리 성문화되지도 않았고, 신하와 백성의 행동 준칙도 아니므로 군주 혼자 독점해야 하는 수단이다. 


한비는 인간의 본성은 이해득실만을 따질 뿐 도덕성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늘 어긋난다. 그래서 한비는 이들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으로 법을 제시한 것이다. 한비는 순자처럼 인간의 이러한 악한 본성을 변화시켜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였다. 순자는 그 수단으로 인위적인 교화에 역점을 두었던 데 반해 한비는 상과 벌을 수단으로 사용했다. 


한비는 유가나 묵가의 사상을 반대한 것과는 달리 도가 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도가는 인간의 본성이 순박하다고 보고 절대적인 자유를 옹호한 반면, 한비는 인간을 악하다고 보고 사회적인 통제를 주장했다. 


한비가 내세운 ‘무위’란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 법칙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생활하라는 말이다. 결국 법도 자연의 법칙과 같이 인위성을 배제하고 순리대로 처리해야 공평하고 권위가 있다. 한비는 통치의 무위는 기본 원칙을 자연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제시한다. 


 



시민혁명 - 부르주아지의 권력 쟁취기


 유럽의 근대는 시민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당시의 시민이란 부르주아지를 의미한다. 현대적 의미의 시민은 이 부르주아지들과 민중들의 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 대륙의 귀족들은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을 천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양반들은 상업 활동을 천박한 것으로 인식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체계를 따라 상인 계급을 낮게 보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인식이었다.(예외적으로 영국 귀족은 돈을 좋아했다고 한다.) 게으른 귀족들 덕분에 신분이 낮은 평민들은 상업 활동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상인의 자제들은 생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어서 대학 등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실용적인 학문들을 배우며 국가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철학같은 인문학을 공부하며 머리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실력을 차곡차곡 쌓은 상인 계급은 부르주아지로 불리게 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부르주아지의 등장이 절대왕정 체제와 시민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부르주아지들의 투쟁을 통해 어떻게 유럽의 역사가 바뀌어 나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절대왕정 체제는 왜 생겨났을까? 거시적으로 봤을 때 세 가지의 배경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경제적 이유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유럽은 낮은 농업생산성으로 경제성장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아이를 많이 낳아도 그 아이들을 먹일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고, 흉년이라도 드는 경우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전염병까지 같이 도는 상황이 발생하면 농업 활동이 마비되고, 일꾼들이 사라지며, 파종과 수확이 어려워지고, 결국 땅이 버려진다. 주기적인 기근은 전반적인 경제 불안을 가중시키는 것은 물론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그리고 인구 증가와 신대륙에서 은이 유입되며 가격 혁명이 일어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두 번째는 전쟁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 전쟁,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쟁 등으로 전쟁이 상시화 되며 군대 규모가 커지게 된다. 중세 까지는 각 지방의 영주 중심의 소규모 군대가 전쟁의 중심이었지만 근대로 넘어오며 군대가 국가 단위로 커지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는데 바로 현대적 화기로 경무장한 군인들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중무장 기사와 달리 급료를 받는 상비군의 형태이다. 화기의 발전으로 중무장 기사들을 대체한 이들은 왕에게 충성하는 군대로, 귀족은 이제 왕에게 의존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 왕은 충분한 상비군을 통해 확고한 조세 수입원을 확보하고 조세 수입을 통해 충분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였다. 


 세 번째는 사회의 변화이다. 인플레이션과 전비 증가로 인해 세금이 인상되자 백성들은 고통에 빠진다. 또한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 과학 혁명으로 인한 세계관의 혼란과 정신적 위기를 겪게 된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은 정신적 혼란의 양상으로서 사적인 권력 행사가 공적인 국가 권력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국가의 신성한 권위와 국왕이 지닌 절대적인 권력의 정당성이 확인되었다. 


 핵심적인 것은 왕의 권력이 강해지고 귀족의 권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절대왕정 체제로 가기에는 부족했다. 왕은 자신을 받쳐줄 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부르주아지들이다. 왕 자신을 정점으로 귀족과 부르주아지 두 세력을 거느리는 전략을 취한다. 중세 시대에는 이름만 왕이고 실질적으로 지방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했다. 


그만큼 귀족들의 힘이 강력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왕은 귀족의 힘을 누를 반대 세력이 필요했고, 부르주아지는 돈과 함께 권력을 잡고 싶어 했다.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왕에게 세금을 바치며 충성했고, 왕은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 시기 세금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국세청같은 조직이 필요하다. 그래서 관료제가 시행되고 부르주아지들이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또한 왕은 국가 재정 부족으로 관직을 부르주아지들에게 판매한다. 부르주아지들은 관직을 매수함으로써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고 사유재산이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절대왕정의 특징으로 중상주의가 있다. 중금주의라고도 불리우는데 이것은 화폐가 많은 나라가 강대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입을 최소화하고 수입을 최대화하는 보호무역주의를 펼치고, 여기서도 부르주아지들이 활약을 하며 무역을 책임진다. 그리고 상업, 통상의 증가로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절대왕정 체제를 더 공고히 했다.

 

 부르주아지들은 상업 활동으로 부를 얻었고, 관직에 진출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사회와 문화도 그들의 후원으로 다양한 책과 예술작품 등이 나왔다. 결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서 부르주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왕이 왕권신수설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부르주아지들은 뒤에서 비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실질적으로 나라를 움직이는 건 왕도 귀족도 아닌 부르주아지들이었다.


 절대주의는 군사적인 우월 의지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진 대외전쟁은 국왕으로 하여금 예외적인 자금 조달 방법을 선택하게 했고, 전쟁과 그것이 수반하는 사회적 긴장이야말로 절대 왕정의 필수 조건이었기에 예외적인 방법은 반영구적 체제로 고착되는 경향이 짙었다. 


절대 군주의 권력이 절정에 달할수록, 그것이 지닌 예외적인 상황 또한 극에 달하는 셈이었다. 이것은 마치 담배가 몸에 안 좋다는 것을 알지만 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전쟁 수행을 위해 끊임없는 재정 압박에 힘겨워 한 왕이 정말로 절대적이었는지 의문스럽다.  


 왕은 자신의 절대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을 대립시켜서 그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은 귀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부르주아지 세력의 힘을 키워주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목을 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은 자신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암세포가 전이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고, 부르주아지들은 야금야금 자신들의 힘을 키워나갔다.


 때가 무르익었다. 왕은 아직도 자신이 절대 군주라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커질 대로 커진 부르주아지들은 왕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구조적인 사회경제적 모순이 주기적인 경기 변동이나 전쟁이라는 예외적인 상황과 결합되었을 때, 정부가 지나친 증세를 요구하게 되면 정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다. 증세는 그 자체도 문제지만, 조세를 어떻게 부담시킬 것인가의 문제 때문에 잠재적인 사회 갈등을 격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여기서 부르주아지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가 통제하는 입헌 군주제 정부 수립’이라는 기치 아래 민중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든다. 


미사일의 발사 스위치를 누른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유명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 세력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바스티유를 함락했고 구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부르주아지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자신들이 특권 계급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자신들이 거리에서 피 흘리며 혁명을 지켜냈다고 생각한 민중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후 온건파와 급진파가 대립하고 타국과 전쟁을 벌이는 등 혼란이 계속됐지만 결국 민중은 혁명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보유한 군대에 의지한다. 혁명전쟁 과정에서 급격히 영향력을 확대한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유능한 장군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말은 바로 나폴레옹 군사 독재였다. 민중에 의한 혁명은 군사독재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았다.


 시민 혁명은 분명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봉건제가 폐지되고 신분의 구별도 사라졌다. 구체제 하에서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이 누리던 특권도 사라졌다. 혁명을 통해 국가는 국민 주권이라는 새로운 원칙에 입각해 재조직되었다. 시민들은 신체의 자유와 권리에 있어서 평등해졌고, 시민 혁명의 논리적 귀결은 공화국의 수립이었다. 


하지만 이 공화국은 모든 시민이 기본권으로서 시민적 권리를 누리지만, 정치적 권리는 시민들 가운데서 재산 자격을 갖춘 일부 ‘정치적 국민’의 몫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피의 신분제’를 ‘돈의 신분제’로 바꾼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부르주아지들은 철저히 민중을 이용해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혁명 이후 왕은 더 이상 예전의 왕이 아니었으며,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적 계급은 사라졌다. 그리고 민중은 제도적으로 다스렸다. 이제 본격적인 부르주아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근본적으로 귀족이나 부르주아지나 소수 특권 계층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귀족은 피로 정해지는 신분이고, 부르주아지는 돈으로 정해지는 신분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귀족에서 부르주아지로 권력이 이양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근대 유럽의 역사는 부르주아지의 권력 쟁취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절대왕정 체제는 왕과 그들의 이해관계 일치로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들의 성장이 결국 왕을 쓰러뜨리고 구체제를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볼 때 절대왕정 체제는 시민혁명의 원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절대왕정 체제와 시민혁명을 거쳐서 부르주아지들은 마침내 돈과 권력을 모두 차지하며 근대 유럽사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2012년 11월 2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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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을 다녀와서


 수원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다. 그것을 처음 느낀 것은 화성행궁으로 가는 길에 팔달문을 보았을 때였다. 도심 한 복판에 그런 옛 건축물이 있다는 게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화성행궁에 도착했더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정문인 신풍루로 들어갔다. 처음 들어갔을 때 눈에 띈 것은 거중기였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정약용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거중기는 수원화성을 지을 때 유용하게 쓰였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 감탄이 나왔다. 


 좌익문 앞에는 옛날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는데, 옷이 많이 더워보여서 안쓰럽기도 했다. 좌우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다. 이곳에는 군인들이 배치되어서 경비를 맡았다고 한다. 또 좌측으로 서리와 비장이 지내는 서리청과 비장청이 있고, 우측으로는 집사가 지내는 집사청이 있다. 이곳들은 별로 특징은 없었다. 


그저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을 잘 나타내주는 건물들이라는 느낌이었다. 비장청 위쪽으로 외정리소 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여러 가지 행사도구들이 있었는데, 우스꽝스러운 것들도 있었다. 


 중앙문을 지나면 봉수당이 나온다. 봉수당은 정조가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 붙인 것이다. 봉수당 옆에 경룡관은 당태종 궁궐을 이름을 차용한 것인데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그 옆쪽에 정조가 행차 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인 유여택이 있다. 유여택 앞에는 해시계가 있는데 어떻게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여택을 지나 복내당으로 들어섰다. 


몇 년 전 인기 있었던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 화성행궁 곳곳에 드라마 촬영의 흔적이 있었다. 난 그 드라마를 별로 보지 않아 그다지 재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찾아온다면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장안성에 있는 궁궐의 이름을 차용한 장락당이 그 옆에 있다. 화성행궁에는 중국 궁궐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 몇 개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조선이 중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노래당, 낙남헌을 지나 득중정으로 나왔다. 그곳에서는 역사 강연이 열리고 있었다. 화성행궁, 수원화성에 관련하여 조선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화성행궁 뒤편의 언덕으로 올라가면 내포사와 미로한정이 나온다. 미로한정은 이름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잠시 쉬며 화성행궁을 내려다보았다. 언덕을 내려와 전사청, 제정 등을 보았다. 


제정을 보니 경주의 포석정이 떠올랐다. 작은 연못에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화성행궁을 다 둘러보고 난 소감은 솔직히 밋밋했다. 뭔가 웅장한 건축물들을 기대하고 갔던 탓인지, 소박한 건물에 실망했다. 하지만 예술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또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한구석에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2008년 상반기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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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The Daffodils) 번역 


The Daffodils  by William Wordsworth


The Daffodils / William Wordsworth(1770-1850)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Continuous as the stars that shine

And twinkle on the milky way,

They stretched in never-ending line

Along the margin of a bay:

Ten thousand saw I at a glance,

Tossing their heads in sprightly dance.

 

The waves beside them danced; but they

Outdid the sparkling waves in glee;

A poet could not but be gay,

In such a jocund company;

I gazed-and gazed-but little thought

What wealth the show to me had brought:

 

For lft, when on my couch I lie

In vacant or in pensive mood,

They flash upon that inward eye

Which is the bliss of solitude;

And then my heatt with pleasure fills,

And dances with the daffodils.


수선화 by 윌리엄 워즈워스


나는 한 가닥 구름처럼 외로이 돌아다녔네

골짜기와 언덕 높이 떠다니는 

나는 불현 듯 한 무더기의 황금 수선화를 보았다.

호숫가 나무 밑에 미풍 속에 한들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황금 수선화를.


계속해서 빛나는 별처럼 

은하수에서 반짝이며 

끝없는 줄을 지어 뻗어 있었다.

만 가장자리를 따라서

한 눈에 수 많은 수선화를 보았네

경쾌하게 춤을 추며 고개를 흔드는.


그들 옆의 물결도 춤을 췄건만

즐거워 반짝이는 파도를 수선화가 능가하였네

시인이 어찌 즐겁지 아니했겠는가

그 즐거운 무리 속에

나는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네. 하지만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네

수선화가 어떤 기쁨을 나에게 가져왔는지는.


왜냐하면 종종 내가 침상에 누워 있노라면

하염없이 혹은 깊은 생각에 잠겨

수선화가 내적인 눈에 번뜩여

고독의 축복인 그

내 가슴이 기쁨으로 가득 차서 수선화와 덩실덩실 함께 춤을 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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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6일 작성


『공리주의』서평



  『공리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저술한 책으로 그는 머리말에서 수천 년 간 옳고 그름에 관한 기준을 수많은 사람들이 논의 했으나 명확한 제 1의 도덕원리가 나오진 않고 그 입장에 학파만 갈렸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중 하나인 칸트는 그의 책 『도덕형이상학』에서 도덕적 의무의 기원과 근거가 되는 보편적 제 1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행위 규범이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들에게 하나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행동하라.” 


그러나 그는 이 법칙에서 어떤 실제적인 도덕적 의무를 연역해내려고 하는 순간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하고 만다. 왜냐하면 정말 이상하게도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들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도덕적인 행동 규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심각한 모순이거나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밀은 칸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들이 보편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나서 얻은 결과가 이러이러하므로 그 누구도 감히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이런 한계가 있는 이론을 넘어 공리주의를 주창한다. 


  먼저 밀은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공리주의의 명확한 정의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공리주의는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다.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것의 정의이다. 여기서 행복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행복과는 좀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쾌락의 결핍, 그리고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들어있는 쾌락 때문에 또는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을 늘려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가 된다. 


이 이론은 인생을 너무 쾌락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짐승이 느끼는 쾌락과 인간이 느끼는 쾌락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다. 바로 이것이 질적 공리주의의 출발점이다. 쾌락의 질을 따진다고 해서 공리주의 원리에 손상이 가지는 않는다. 어떤 두 가지 쾌락이 있다고 할 때,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 같은 것과 관계없이 그 중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쾌락에 대해 똑같이 잘 알고, 그 둘을 똑같이 즐기고 음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보다 높은 능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특정 삶의 방식을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가지고 있다. 이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결코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결국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더 나은 것이다. 


밀에 따르면 바보나 돼지가 이런 주장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한쪽 문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비교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들은 두 측면 모두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러한 점이 쾌락에는 질적 차이가 없다고 바라본 벤담의 생각과는 명확히 다르다.


  한편 밀은 이러한 행복이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만의 최대 행복이 아닌 사회 전체의 행복을 생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대 행복 원리’를 따를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든, 가능한 한 고통이 없고 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상태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된다. 밀에 따르면 이 상태는 인간 행동을 위한 규칙과 지침이라 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따르게 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행복이 인간 삶과 행동의 합리적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은 행복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반박했다. 여기에 밀은 효용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불행을 방지하거나 완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 상태는 지속 불가능하며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행복을 고통은 일시적인 것 외에는 별로 없는데 쾌락은 다양하게 많은 순간을 행복이라고 부른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이런 수준의 행복은 정상적이고 올바른 교육과 사회제도만 갖춰진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공리주의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 세상 또는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성에 입각해서 살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영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公利와 功利에 대한 혼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선한 행동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 개인들의 이익이 모여 사회의 이익이 형성된다. 밀은 이밖에도 공리주의에 관련된 다양한 오해들에 대해 반박을 한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의 효용 원리를 따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효용 원리는 다른 모든 도덕 체계가 행사하는 윤리적 제재를 전부 가동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외부적 제재와 내부적 제재가 있다. 외부적 제재는 두려움, 동정심, 호감, 경외심 등인데 남들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다른 사람이 행하는 행동을 보고 느끼는 감정, 단편적으로 들어나는 일반적인 느낌이다. 


반면 내부적 제재는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하나의 느낌을 말하는 것으로 의무를 위반하게 되면 강하든 약하든 일종의 고통이 수반된다.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정도가 심하면 단순한 감정을 넘어 극심한 고통으로까지 발전한다. 밀은 이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인 도덕적인 자연 감정에 기반 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연적 감정의 기초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감정이 있다. 이것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인데, 이것은 이미 인간 본성 속에서 강려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다행스럽게도 굳이 인위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에 비례해 점점 강해진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공리주의의 효용 원리가 잘 작동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밀은 정의와 효용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철학이 시작된 이래, 효용이나 행복이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이론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를 제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의justice에 관한 생각이다. ‘정의’라는 용어의 어원은 심판 혹은 법의 집행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이것이 효용이나 행복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정의라는 말은 행동 규칙과 그 규칙에 강제력을 불어넣어주는 감정, 이 둘을 상정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 것은 규칙을 위배하는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나의 정의감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 자신 또는 그 사람이 동정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나 손해를 물리치거나 보복하고자 하는 동물적 요구와 같다. 바로 이 감정으로부터 그 느낌이 도덕성을 갖추게 된다. 


또한 정의라는 것은, 인간 삶을 이끄는 어떤 규칙보다 더 진지하게 인간의 참된 복리에 대해 염려하고 따라서 어느 것보다도 더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 도덕적 규칙을 지칭한다. 우리가 정의라는 개념의 본질적 요소라고 규정한 것, 모든 사람이 권리를 지닌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보다 강한 구속력을 암시하며 정당화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영향력을 지니며 어느 누구도 남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잘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을 사회가 똑같이 잘 대우해야 한다. 밀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수준, 분배 정의에 관한 최고 수준의 추상적 수준이다. 


  그는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불평등은 불의로 규정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가 짓밟히는 상황과 불평등에 대해 무관심 했다. 하지만 밀은 사회 진보의 전 역사는 수정과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라는 개념이 사회 전체 차원에서 사회적 효용이 아주 높기 때문에 불평등한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고할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다. 


자연적으로 도덕적 감정을 느끼며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 혼자 잘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보다, 함께 더불어 잘 살기 위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정의라는 용어에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인 행복, 효용이 깊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들은 절대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 


  이상이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주장이다.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중요시하며 그 행복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밀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개인의 이익'이다. 왜냐하면 공리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 하면 집단과 국가의 이익은 저절로 증가한다.'이기 때문이다. 특히 밀은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시하여 『자유론』이라는 책을 썼고, 그 책에서 개인의 자유는 국가를 대상으로 테러를 하거나 공익에 반대되는 행위가 아니라면, 어떠한 이유에서도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렇다면 왜 밀은 ‘개인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밀이 살던 당시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던 시기였다. 또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전 세계에 걸쳐 광활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처럼 해가지지 않는 대영 제국은 나날이 번창했지만 소수 자본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 국민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삶은 각박했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노동현장으로 내몰렸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밀로 하여금 자유와 공리주의 철학을 주장하게 만든 것이다. 


  한편 밀은 사회적 이익의 증대를 위한 정부의 개입과 더불어 개인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 분배에 관한 사회적 제도의 수립까지도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공리주의는 효용의 증진을 위한 경제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면서도 효용이 어느 일방으로 흐르지 않는 평등한 세계관을 주장한다. 이처럼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더욱 정교한 이론으로 발전시켜서 명확하고 보편적인 ‘제 1의 도덕원리’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밀의 공리주의 이론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개인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익까지 고려해야 하는 덕에 개인의 소외를 불러온다거나 특정한 소수의 이익을 저버릴 수 있다는 한계로 인해 비판 받았다. 또한 가장 결정적인 이론적 결함은 인간이 도덕적인 자연 감정인 사회성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경험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밀은 그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만 주장할 뿐, 실제로 그가 경험과 관찰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아니다. 


제 1의 도덕원리라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그의 생각과 배치되는 모습이 상당히 나타난다. 결국 밀의 기대와 달리 공리주의가 우리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기준을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성찰했던 그의 노력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살았던 시대처럼 현재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미 4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휘몰아쳤었다. 정의에 관한 이 책에서도 공리주의가 앞 장에 소개되며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을 한다. 그리고 이 열풍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 복지 담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14년에는 ‘정의’라는 다소 추상적 주제보다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부의 불평등’문제에 대해 전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저작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내용에서 촉발되었다. 피케티의 연구에 의하면 자본주의 역사 300년간 자본수익률은 항상 경제성장률을 앞서기 때문에 자본가는 근로자보다 더 많은 소득을 취할 수 있고, 더구나 자유로운 부의 세습으로 인해 자본가와 근로자, 부자와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의 소득 불평등은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공리주의는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행복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긴 인본주의적 사상이다. 지금 같은 시장 만능주의에 빠진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그의 사상을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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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찬미 번역과 감상

(제목은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다. 인생찬가, 생의 찬가 등)

A Psalm of Life

BY HENRY WADSWORTH LONGFELLOW

What The Heart Of The Young Man Said To The Psalmist.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Life is but an empty dream!
For the soul is dead that slumbers,
   And things are not what they seem.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Dust thou art, to dust returnest,
   Was not spoken of the soul.

Not enjoyment, and not sorrow,
   Is our destined end or way;
But to act, that each to-morrow
   Find us farther than to-day.

Art is long, and Time is fleeting,
   And our hearts, though stout and brave,
Still, like muffled drums, are beating
   Funeral marches to the grave.

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In the bivouac of Life,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Be a hero in the strife!

Trust no Future, howe’er pleasant!
   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
Act,— act in the living Present!
   Heart within, and God o’erhead!

Lives of great men all remind us
   We can make our lives sublime,
And, departing, leave behind us
   Footprints on the sands of time;

Footprints, that perhaps another,
   Sailing o’er life’s solemn main,
A forlorn and shipwrecked brother,
   Seeing, shall take heart again.

Let us, then, be up and doing,
   With a heart for any fate;
Still achieving, still pursuing,
   Learn to labor and to wait.



생의 찬미 by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슬픈 목소리로 내게 말하지 마라,

인생은 다만 헛된 꿈이라고!

잠든 영혼은 죽은 것이고,

만물은 보이는 것 그대로는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것의 목표는 아니다.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은 영혼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기쁨도 슬픔도 아니다,

우리가 처한 운명이 가야할 길과 가는 길은.

하지만 행동하는 것이 인생이다.

저마다의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예술은 길고,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리고 우리의 심장은, 비록 튼튼하고

여전히 천을 씌운 북처럼, 울리고 있다.

무덤으로 가는 장송곡을.


세상의 넓은 전장에서

인생의 야영지에서

바보같이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고! 

싸움터에 나선 영웅이 돼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마라!

죽은 과거로 하여금 그것의 죽음을 묻게 하라!

행동하라, 살고 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신이 있다!


위대한 인간의 삶은 우리 모두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삶을 숭고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떠날 때 남길 수 있다.

시간의 모래 위에 발자국을.


발자국, 아마 또 다른 이가,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넘어 항해하다가

외로이 난파한 형제를 보고,

다시 용기를 얻게 할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일어나 일하자,

어떤 운명에 처할지라도 용기를 갖고

끊임없이 성취하고 추구하면서

일과 기다림을 배우자.




2012년 상반기 작성


생의 찬미 감상문


 이 시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살자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의 찬미’를 읽고 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다른 작품들이 떠올랐는데, 먼저 1989년에 개봉된 영화 ‘Dead Poets Society’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 유명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의 라틴어로 영어로는 Seize the day로 흔히 쓰고 있으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비슷하게 알프레도 디 수자의 시 구절 중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도 생각났습니다. 이 작품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지금 살고 있는 시점에 집중하여 후회 없는 인생을 살자는 것입니다. 


 이 시를 읽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그다지 현재에 충실한 삶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 한 가지에 미쳐서 파고드는 집중력이 부족했습니다.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 정도면 되겠지’와 같은 생각을 하며 적당히 넘기는 식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좀 더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야겠다는 걸 느꼈습니다.


 시에서는 또한 후손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등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분명 성취를 할 수 있을 것이고, 후손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발자국으로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현재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먼 훗날 누군가의 등대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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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일 작성


『올림픽의 몸값』서평



 『올림픽의 몸값』은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 당시 일본의 사회경제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올림픽을 인질로 삼고 국가로부터 몸값을 받아내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화려한 모습 뒤에 감춰진 씁쓸하고 불편한 사실들을 ‘시마자키 구니오’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시마자키 구니오는 일본 도호쿠 지방 아키타현의 시골마을 출신으로, 뛰어난 머리로 도쿄대 경제학부에 입학한 수재이다. 


그가 도쿄에 처음 와서 놀란 것은 도쿄와 아키타의 엄청난 경제력 차이였다. 자신들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느끼게 된 것이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는 그 당시 많은 도쿄대생이 참여하던 학생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조용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형의 죽음으로 인해 도쿄 올림픽 공사현장을 경험하게 되면서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이 증폭된다. 


 그의 고향인 아키타는 그야말로 가난한 농촌 지역으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의 농촌에서는 여자들은 20살 무렵이면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평생 동안 시집살이를 하며 농사만 짓다가 생을 마감한다. 농사일은 너무나 고되고 소득은 말할 수 없이 적었다. 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얻을 수 있는 수입은 한정적이었고 여행 한 번 제대로 가기 힘든 형편이었다. 또한 인신매매의 형태로 얼굴이 반반하면 게이샤로 팔려가고, 별 볼일 없는 얼굴이면 숯가마 터에 식모로 팔려가기도 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중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남자들은 식구들을 위해 돈을 벌려고 농촌을 떠나 홋카이도의 탄광이나 도쿄의 공사 현장에 막노동 인부로 떠났다. 가족들 얼굴은 거의 보지도 못 하는 생활이었고, 그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받은 봉급은 대부분 고향집으로 보냈다. 그들의 근로환경은 열악했다. 


허름한 합숙소에서 잠을 자고, 휴식시간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위에서 일 하라고 하면 쉬지도 못하고 계속 일해야 했고, 심지어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에 무려 16시간 노동을 강요받았다. 막노동 인부들은 이런 고되고 힘든 상황을 잊기 위해 필로폰을 맞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암울하고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더불어 마르크스에 심취해 있던 시마자키 구니오는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알기 위해 노동을 하게 된다. 그는 육체노동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타락하고 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로잡는 건 프롤레타리아를 빼고는 없다는 믿음을 가졌는데, 이는 1960년대 일본 학생 운동의 이념과 맞닿아 있었다. 


1960년대의 일본은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일본은 1960년대 초반 미일 상호 안보조약에서 일본의 주권 침해, 평화헌법 위배 문제로 인해 안보투쟁이 전개된다. 이 시기 일본의 대학 자치기구(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은 안보투쟁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게 되지만, 단순한 학생기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전학련의 구성원 대부분이 구체적인 목표 없이 추상적이었고, 헤게모니 싸움으로 인해 내부 투쟁이 심했으며, 투쟁 방식도 피켓 시위나 수업 거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별로 효력이 없었다. 이는 소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라타가 학생 운동을 철없는 어린아이 소꿉장난으로 취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마자키가 이들과 연대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아마 작가는 그 당시 학생운동을 비판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처럼 시마자키 구니오는 유산계급을 경멸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재밌는 건 백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후 미군 주둔군 장교의 가족 숙소로 사용하던 워싱턴하이츠를 보며 그는 ‘전국이 가난에 시달리던 전후의 피폐함 속에서도 미국인은 도쿄 한복판에서 본국에서와 똑같이 우아한 삶을 살았다’고 느낀다. 백인은 유색인종의 번영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장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백인의 본심은 여전히 패권주의라 느꼈다. 


그리고 시마자키는 한 호텔 앞을 지나가다 서양인처럼 차리고 다니는 일본인을 보며 백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눈이 벌게졌다며 경멸한다. 이러한 새로운 유산계급의 탄생은 노동자 계급을 그대로 존속시키려는 꿍꿍이라 여겼다. 그에게 있어 백인은 하나의 유산계급이었던 것 같다. 백인이라고 해서 다 유산계급인 것은 아니다. 


그들 나라와 사회에도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 나뉘어져 있다.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시마자키는 일본의, 넓게 잡는다면 아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해방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소설 중간에 그가 올림픽 몸값을 받아낸 뒤 조총련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북한으로 도주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장면이다. 그는 현실 사회주의를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마자키가 백인에 대해 배타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일본인의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 같다. 소설 속에서 패전(敗戰)이라는 표현 대신 종전(終戰)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패전 이후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는 표현이다. 일본은 패전이 아닌 종전, 침략이 아닌 자위, 일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위해서,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히로히토 천황의 ‘종전초서’를 살펴보면 `침략 전쟁`, `패전` 등의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천황은 전쟁 책임이 없고, 그들이 일으킨 전쟁은 서양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 전쟁이었다. 또한 이대로 전쟁이 지속되면 인류 평화를 해치게 되니 평화를 사랑하는 천황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일본인들은 도쿄 대공습,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 등을 들어, 일본 또한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시마자키의 생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전후의 일본은 빈부격차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전후의 재벌 해체와 농지개혁에 의해 지배층은 그 세력이 약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벌이 일족에서 기업으로 옮겨갔을 뿐이고 민중에게는 그 혜택이 내려오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은 계속 가난한 상태였다. 계층적 빈부격차 뿐만 아니라 지역적 빈부격차도 심했다. 이는 작품 속에서 아키타의 한 아주머니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초현대 도시 도쿄에 와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키타에서는 볼 수 없는 초고층 건물과 도쿄타워,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져서 관광을 한다. 


도쿄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이후 일본은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마치 40년대의 전시 총동원 체제를 방불케 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에 따라 도쿄에는 사회기반시설, 체육관, 고층 건물 등이 들어섰고, 모노레일, 신칸센 같은 교통수단도 개통되었다. 1945년 패전 이후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낸 결과물을 전 세계에 자랑하기 위해 일본은 모든 노력을 다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대한 투자는 배제 되었다. 올림픽은 도쿄에서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쿄에 있는 노숙자, 부랑자, 야쿠자 등 외국인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안 보이는 곳으로 옮기고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을 다 정리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 토를 달지 않았다. 상류층부터 최하층 막노동 일꾼과 농사꾼까지 모두 한 마음으로 일본의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기원했다. 이런 열망은 이념도 가리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학생 운동을 하는 좌파 대학생들도 올림픽을 보고 싶어 하며, 올림픽에 방해되는 행동을 했다가는 향후 100년간 좌파 운동은 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모든 일본인들이 간절히 바라는 올림픽을 망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좌파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야쿠자들도 정부에 협력했다. 일본 정부는 야쿠자들에게 올림픽 기간 동안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중할 것을 요청했고, 그에 화답하여 야쿠자들은 올림픽 기간 동안 도쿄를 떠나 있기로 하였다. 올림픽 개최를 구실로 도쿄는 온갖 특권들을 독차지했지만 지방에서는 별 다른 반발도 없었다. 올림픽 공사현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갔지만 언론에는 제대로 보도되지도 않았고 국민들은 알지도 못 했다. 노동자들은 단지 올림픽을 위한 인간 희생물로 국가에 바쳐졌다. 시마자키는 이런 현실에 분노했다.


 어째서 일본인들은 이렇게 한 마음으로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했던 것일까.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전쟁의 상흔에서 점차 벗어나고 엄청난 경제성장도 이룩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금 국제사회에 진출하고 그들의 재기를 알렸다. 올림픽 개최로 일본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시마자키는 이를 서구적 보편사상에의 순진한 영합이라고 평가절하 한다. 


그는 서구 문명은 전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서구사회에서 구조화된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올림픽을 위해 급조된 건축물들에는 서구적인 도시로 거짓되게 꾸미려고 안달하는 도쿄의 왜곡됨이 드러나 있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올림픽은 민중에게 헛된 꿈을 부여하여 현실을 잊게 만드는 지배층의 상투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지배층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군사 정권이 3S 정책과 함께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통해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고 정권을 유지하려 했었다. 이처럼 일본 정부도 올림픽을 통해 내부적으로는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불만을 잠재우며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힘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시마자키는 이런 올림픽은 일본 민중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올림픽 경기장을 폭파시키겠다고 정부를 협박하여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싶으면 8000만엔의 몸값을 내라고 요구한다. 이는 상징적인 것으로, 도쿄와 유산계급만의 일본이 돼가는 현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비록 시마자키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를 통해 1964년의 일본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 뒤에 가려진 이면과 민중들의 피폐한 삶을 보며 과연 그 시절은 영광의 역사이기만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경제는 계속 성장하지만 일반 국민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볼 때 50년이 지난 2014년에도 시마자키 구니오의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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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전조 번역과 감상


Auguries of Innocence
 
William Blake (1757–1827)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A robin redbreast in a cage        5
Puts all heaven in a rage.
A dove-house fill’d with doves and pigeons
Shudders hell thro’ all its regions.
A dog starv’d at his master’s gate
Predicts the ruin of the state.        10
A horse misused upon the road
Calls to heaven for human blood.
Each outcry of the hunted hare
A fibre from the brain does tear.
A skylark wounded in the wing,        15
A cherubim does cease to sing.
The game-cock clipt and arm’d for fight
Does the rising sun affright.
 
Every wolf’s and lion’s howl
Raises from hell a human soul.        20
The wild deer, wand’ring here and there,
Keeps the human soul from care.
The lamb misus’d breeds public strife,
And yet forgives the butcher’s knife.
The bat that flits at close of eve        25
Has left the brain that won’t believe.
The owl that calls upon the night
Speaks the unbeliever’s fright.
He who shall hurt the little wren
Shall never be belov’d by men.        30
He who the ox to wrath has mov’d
Shall never be by woman lov’d.
The wanton boy that kills the fly
Shall feel the spider’s enmity.
He who torments the chafer’s sprite        35
Weaves a bower in endless night.
The caterpillar on the leaf
Repeats to thee thy mother’s grief.
Kill not the moth nor butterfly,
For the last judgment draweth nigh.        40
He who shall train the horse to war
Shall never pass the polar bar.
The beggar’s dog and widow’s cat,
Feed them and thou wilt grow fat.
The gnat that sings his summer’s song        45
Poison gets from slander’s tongue.
The poison of the snake and newt
Is the sweat of envy’s foot.
The poison of the honey bee
Is the artist’s jealousy.        50
 
The prince’s robes and beggar’s rags
Are toadstools on the miser’s bags.
A truth that’s told with bad intent
Beats all the lies you can invent.
It is right it should be so;        55
Man was made for joy and woe;
And when this we rightly know,
Thro’ the world we safely go.
Joy and woe are woven fine,
A clothing for the soul divine.        60
Under every grief and pine
Runs a joy with silken twine.
The babe is more than swaddling bands;
Throughout all these human lands
Tools were made, and born were hands,        65
Every farmer understands.
Every tear from every eye
Becomes a babe in eternity;
This is caught by females bright,
And return’d to its own delight.        70
The bleat, the bark, bellow, and roar,
Are waves that beat on heaven’s shore.
The babe that weeps the rod beneath
Writes revenge in realms of death.
The beggar’s rags, fluttering in air,        75
Does to rags the heavens tear.
The soldier, arm’d with sword and gun,
Palsied strikes the summer’s sun.
The poor man’s farthing is worth more
Than all the gold on Afric’s shore.        80
One mite wrung from the lab’rer’s hands
Shall buy and sell the miser’s lands;
Or, if protected from on high,
Does that whole nation sell and buy.
He who mocks the infant’s faith        85
Shall be mock’d in age and death.
He who shall teach the child to doubt
The rotting grave shall ne’er get out.
He who respects the infant’s faith
Triumphs over hell and death.        90
The child’s toys and the old man’s reasons
Are the fruits of the two seasons.
The questioner, who sits so sly,
Shall never know how to reply.
He who replies to words of doubt        95
Doth put the light of knowledge out.
The strongest poison ever known
Came from Caesar’s laurel crown.
Nought can deform the human race
Like to the armour’s iron brace.        100
When gold and gems adorn the plow,
To peaceful arts shall envy bow.
A riddle, or the cricket’s cry,
Is to doubt a fit reply.
The emmet’s inch and eagle’s mile        105
Make lame philosophy to smile.
He who doubts from what he sees
Will ne’er believe, do what you please.
If the sun and moon should doubt,
They’d immediately go out.        110
To be in a passion you good may do,
But no good if a passion is in you.
The whore and gambler, by the state
Licensed, build that nation’s fate.
The harlot’s cry from street to street        115
Shall weave old England’s winding-sheet.
The winner’s shout, the loser’s curse,
Dance before dead England’s hearse.
Every night and every morn
Some to misery are born,        120
Every morn and every night
Some are born to sweet delight.
Some are born to sweet delight,
Some are born to endless night.
We are led to believe a lie        125
When we see not thro’ the eye,
Which was born in a night to perish in a night,
When the soul slept in beams of light.
God appears, and God is light,
To those poor souls who dwell in night;        130
But does a human form display
To those who dwell in realms of day.


순수의 전조 by 윌리엄 블레이크


모래 한 알 속에서도 세상을 보며,

한 송이 들꽃 속에서도 천국을 보며,

손바닥에서 무한을 잡으며,

순간 속에서도 영원을 잡는다.

새장 속의 붉은 가슴 울새 한 마리가

온 천국을 분노케 한다.

크고 작은 비둘기로 꽉 찬 비둘기 집이 

지옥을 구석구석까지 떨게 한다.

주인집 문 앞에 굶어 죽은 개 한 마리가

한 나라의 멸망을 예언한다.

길 위에서 혹사 당하는 말 한 마리가

하늘에 인간의 피를 호소한다.

사냥꾼에 쫓겨 토끼가 내는 비명은

인간의 뇌에서 조직을 찢어 낸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천사는 노래를 그만 둔다.

싸움닭은 싸우기 위해 무기를 다듬어

떠오르는 태양을 놀라게 한다.

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끌어 올린다.

여기저기를 헤메는 야생 사슴은

걱정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지켜준다.

학대받는 양은 대중 투쟁을 낳지만,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

저녁 무렵 날개짓 하는 박쥐는

믿지 못하는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올빼미가 밤에 내는 울음소리는 

불신자의 공포를 말한다.

작은 굴뚝새를 해치는 사람은

인간의 사랑을 받지 못 한다.

황소를 분노케 하는 사람은

절대 여성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파리를 죽이는 개구쟁이 소년은

거미의 증오를 받는다.

풍뎅이의 요정을 괴롭히는 사람은 

끝없는 밤에 침실을 만든다.

나뭇잎에 있는 애벌레는 

당신 어머니의 슬픔을 반복한다.

나방과 나비를 죽이지 마라,

최후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

전쟁을 위해 말의 행렬을 이끄는 사람은

극지대를 통과할 수 없다.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 그대는 살이 찔 것이다.

여름 노래를 부르는 모기는 욕하는 혀로부터 독을 얻는다.

뱀과 도롱뇽의 독은

질투의 발에 난 땀이다.

꿀벌의 독은

예술가의 질투이다.

왕자의 예복과 거지의 누더기는

불쌍한 사람의 가방에 난 독버섯이다.

악의로 말해진 진실은 그대가 만든 모든 거짓을 이긴다.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게 맞다.

인간은 즐거움과 비통을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우리는 안전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즐거움과 슬픔은

신성한 영혼을 위하여 의복을 잘 만든다.

슬픔과 사모 밑에는

기쁨의 비단실이 두 겹 깔려 있다.

아기는 배내옷 이상이다.

모든 인간의 땅의 어디에서나 

연장은 만들어지고, 손은 태어나는 것을

모든 농부는 알고 있다.

모든 눈으로부터 모든 눈물이

영원 안에서 아기가 된다.

이것은 빛나는 여성에 의해 잡히고

그것이 가진 기쁨에 돌아온다.

양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포효, 으르렁 거리는 소리는

하늘의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이다.

아기는 억압에 의해 강탈 당해 눈물을 흘리고

죽음의 영역에서 복수를 쓴다.

허공에 펄럭이는 거지의 누더기는

하늘을 갈기갈기 찢는다.

칼과 총으로 무장한 군인은

여름의 태양을 쳐서 마비시킨다.

가난한 사람의 한 푼의 가치는

아프리카 해안의 모든 금보다 값지다.

진드기 한 마리는 노동자의 손으로부터 짜냈었고

불쌍한 사람의 땅을 사고 팔 것이다.

아니면, 높은 사람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면

국가 전체를 사고 파는 것이다.

갓난 아이의 믿음을 비웃는 사람은

노년과 죽음의 시기에 조롱당할 것이다.

어린이에게 의심하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썩어가는 무덤에서 절대 빠져 나오지 못 한다.

갓난 아이의 믿음을 반복하는 사람은

지옥과 죽음을 넘어 승리한다.

어린이의 장난감과 노인의 이성은

두 계절의 과실이다.

무척이나 교활하게 앉아있는 질문자는

절대 대답하는 방법을 모를 것이다.

의심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지식의 불을 끄는 것이다.

일찍이 알려진 가장 강력한 독은

시저의 월계관으로부터 왔다.

무(無)는 인류를 망칠 수 있다.

갑옷의 철띠처럼.

금과 보석으로 쟁기를 장식할 때

질투가 평화의 예술에게 고개를 숙인다.

수수께끼 또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알맞은 대답을 의심한다.

개미의 인치와 독수리의 마일은

서투른 철학을 웃게 만들 것이다.

그가 본 것으로부터 의심하는 사람은

당신이 무엇을 하건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해와 달이 의심을 품는다면

그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열정 안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당신 안에 열정이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국가의 허락을 받은 매춘부와 도박꾼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거리마다 들리는 매춘부의 울음소리는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짤 것이다.

승자의 외침과 패자의 저주는

죽은 영국의 관 앞에서 춤춘다.

매일 밤 매일 아침

약간의 고통의 태어난다.

매일 밤 매일 아침

약간의 달콤한 기쁨이 태어난다.

약간의 달콤한 기쁨이 태어나고,

약간의 끝없는 밤이 태어난다.

우리는 거짓을 믿는다 말한다

우리의 눈을 통해 보지 않을 때,

밤에 태어나, 밤에 사라지는 것,

영혼이 빛줄기 속에 잠들 때,

신은 나타나고, 신은 빛이다.

밤에 사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하지만 인간의 형태를 보여준다

빛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2012년 상반기 작성


‘순수의 전조’는 아주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래 ‘시’라는 장르가 시시콜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고 상징어들을 많이 사용해서 쓰기는 하지만, 이 시는 그야말로 상징어들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징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문장들이 한 줄 한 줄 허투루 쓴 것 없이 모두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시의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 하였습니다. 아무리 읽어봐도 도대체 무슨 의미로 쓰인 것인지 알쏭달쏭한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시를 읽고 느낀 점은, 시인은 황폐화된 인간 세계를 보고 다시 순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순수의 전조’라는 제목에 비추어 볼 때 ‘순수’라는 것은 결국 자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연물을 보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시인은 순수를 발견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연과 사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며 도덕적 해이가 팽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시에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써 나타납니다. 


 또한 ‘순수의 전조’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모래 한 알 속에서도 세상을 보며”라는 문장을 보면, 모래는 바위가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 깎이고 깎여 만들어집니다. 그 의미는 모래 한 알 속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에서는 이런 식의 통찰력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가 쓰여 진 지 수 백년이 흘렀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시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읽고 조금은 순수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저 또한 오랜만에 시를 읽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2014년 5월 3일 작성


『상록수』서평



 소설 『상록수』는 1935년 작가 심훈이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어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어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30년대에 농촌 계몽 운동을 펼쳤던 인텔리들의 사랑과 시련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한 신문사에서 주최한 농촌 운동가 보고 행사에 참여한 박동혁은 그곳에서 채영신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뜻이 맞아 급격히 친해지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까지 발전한다. 


이후 둘은 도시를 떠나 박동혁은 고향 한곡리로, 채영신은 자신이 활동하던 청석골로 돌아가서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친다. 각자의 지역에서 일하면서도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간다. 한곡리에서 동혁은 마을 청년들을 잘 이끌어서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마을 회관을 짓는다. 이는 어려운 농촌 상황에서 대단한 성과였다. 덕분에 박동혁과 청년들은 자신들이 흘린 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한편 영신은 좁은 교회당 건물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비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아이들이 몰리자 새로운 야학당을 건축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받는다. 기부금을 받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은 야학당 건축에 성공한다. 그러나 영신은 그 과정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일한 것이 화근이 되어 맹장염과 장중첩증으로 쓰러져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그 소식을 들은 박동혁은 부리나케 달려와 영신을 간호하고 서로의 미래에 대해 굳건한 약속을 한다. 


그러던 중 한곡리에서는 고리대금업자 강기천이 온 마을 사람들을 휘어잡고 농우회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박동혁은 바로 한곡리로 돌아온다. 동혁의 친구 건배를 비롯한 많은 마을 사람들이 이미 강기천의 편으로 돌아선 상황에서 동혁은 강기천과 담판을 지으러 간다. 동혁은 강기천에게 마을 사람들이 강기천에게 진 빚을 갚되 법으로 정해진 이자 이상은 받지 말라고 하였다. 동혁을 무서워하던 강기천은 그 제안을 수락하고 마을 사람들의 빚은 탕감 되었다. 그 뒤로 회원들은 물론 마을의 인심은 동혁에게로 쏠렸다.  


 그 뒤 영신은 일본의 기독교 학교로 유학을 결심하고 한곡리에서는 농우회 회장 선거가 열린다. 회장 선거에서 강기천이 박동혁을 제치고 회장으로 당선되자 동혁을 따르던 청년들은 크게 반발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강기천의 횡포에 분노한 동혁의 동생 동화는 마을회관을 불태워버리려 했고, 동혁이 그것을 발견하고 제지하려 하다가 공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영신은 동혁을 면회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조선과 다른 문화에 적응하지 못 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각기병에 걸려 조기 귀국길에 오른다. 그리고 청석골의 하숙방에서 영신은 죽음을 맞이한다. 감옥에서 나와 장례식에 참석한 동혁은 영신의 유지를 받들어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할 것을 다짐하며 다시 한곡리로 향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30년대 초반은 1920년대의 문화통치기에서 식민지 안정화 정책기로 넘어온 시기였다. 1920년대 일제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임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곡가 정책이 필수였고 저곡가 정책을 시행하려면 쌀 생산량이 많아야 했다. 


따라서 일제는 쌀 공급량을 늘리기 위해 조선을 쌀 생산기지화 하여 일본으로 쌀을 빼갔다. ‘산미증식계획’이 바로 이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농지 개량, 경지 정리, 수리시설 정비, 화학 비료 사용, 품종 개량, 농기구 개량 등 농업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정책이 펼쳐졌다. 실제로 농업 생산성은 증가하여 생산량은 이전보다 1.5배가량 증가하였다. 


그러나 생산의 증가가 농가 소득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노동 투입량이 증가하고, 수리 조합비 부담이 커지고 비료도 구매해야 하는 등 자본을 더 많이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빚을 지는 농민들이 늘어났고 그 결과 자·소작농이 몰락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도래하며 일제와 조선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조선에서는 농업 공황이 터지며 농촌의 양극화는 심해졌다. 


이렇게 되자 계급 해방과 일제 타도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구의 약 80% 이상이 농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일제 입장에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농촌 사회의 위기는 식민 지배체제에도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2년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하여 당시 농촌경제의 몰락에 따른 소작농 및 농민들의 사회불안 억제와 소작농, 농민들의 불만 및 각종 소작쟁의 운동 활성화를 통제하는 한편, 본격적인 중국대륙 침략전쟁을 앞두고 '황국신민화'정책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고자 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종교계와 언론계를 중심으로 한 개량주의적 농촌계몽운동도 일제로서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1932년 7월부터 농촌사회의 제어를 통제하기 위한 식민지 지배체제의 안정을 목표로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했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농업정책이 없어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후 농가 경제 갱생 계획을 실시하여 읍면 단위로 30~40호의 갱생 부락을 지정하고 개별 농가까지 관리대상에 편입시켜 총독부의 감시 시선이 마을, 개별 농가 단위까지 침투하게 된다. 그러는 한편 일제는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 완충지대로 ‘농촌 중견인물’을 육성한다. 이들은 농민 출신으로 농민과 지주 간의 이해를 조정하는 식민지배 파트너로 삼았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농가 경제 갱생을 내세웠지만 결국 농민들을 통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1934년에는 조선 농지령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지주의 권리제약과 소작인의 권리강화라는 방향에서의 입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작농 보호입법이라기보다 일본 독점자본의 농촌사회에 대한 직접적 통제의 강화책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내용은 소설에서도 간략하게 나온다.


「농지령(農地令)이라는 것이 발포되었대야 결국은 지주들의 맘대로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니까, 어떻게 강도사 집뿐 아니라 다른 지주들까지도 한 십 개년 동안만 도지로 논을 내놓게 만들었으면, 힘껏 개량식으로 농사를 지어 그 수입으로 땅 마지기씩이나 장만을 하게 될 텐데…… 하고 꿍꿍이셈을 치고 있는 중이다.」


 결국 1930년대의 어려웠던 농민들의 생활과 그에 따른 불만을 통제하기 위해 일제는 온갖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도 농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만큼 1930년대의 농촌은 위기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브나로드 운동(농촌계몽운동)이 전개된다.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초에 일어났던 한국의 학생 운동으로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이다. 1929년부터 이미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 운동을 전개해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1931년 동아일보사의 주도로 농촌의 문맹자들을 가르치는 농촌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상록수의 작가인 심훈과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 등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을 비롯한 대학생과 대졸 출신 인재들이 각지의 농촌으로 가서 봉사, 계몽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은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의 정신을 이어 받아 '갱생의 광명은 농촌으로부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마라!'라는 신념으로 사람들을 가르친다. 계몽운동 세력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된 것은 일제보다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조선인들의 실력을 양성하여 일제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인 현실에서 농촌을 계몽하지 않고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계몽운동과 『상록수』같은 농촌계몽소설은 여러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소설에도 나와 있다시피 이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제가 영신에게 예배당에 너무 많은 인원을 들이지 말라고 통제하는데 여기서 영신의 해법은 그저 그들의 말에 순응하고 앞으로 더 큰 야학당을 짓겠다는 것뿐이었다.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소설 전반에 일제의 잔혹한 통치 같은 것은 느낄 수 없고 그저 농촌 계몽가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소설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실력을 양성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와 닿지가 않는다. 실력을 양성하여 돈을 모아 군대를 창설하여 게릴라 작전을 펼친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실력 양성’에 대한 말만 하고 있다. 영신과 동혁이 왜 그토록 농촌 계몽 운동에 매달리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이 당시 농촌계몽운동가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 나오는 백현경은 당시 돈으로 삼천 원을 들인 호화주택에 사는 여자로 계몽운동을 마치 취미생활 정도로 여긴다. 이들에게 농촌계몽운동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무지 몽매한 농민들을 가르치는데서 오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발표된 1935년은 이미 식민통치가 시작된 지 25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조선 사회 전반에 독립에 대해 체념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대부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사회의 지배층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동경 유학을 선망하였다. 농촌계몽운동 또한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력을 양성하여 일제에 저항한다는 것은 그저 허울뿐인 말이고, 단순한 교육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농민과 농촌을 파괴하고 있는 원인을 외세의 침탈과 봉건 유제라는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서 찾지 않고 농민의 무식과 나태라는 개인적 조건에서 찾았다. 또한 농민 개개인이 열심히 배우고 일해서 생활을 개선해 나갈 때 비로소 민족 해방도 성취되고 농민도 잘 사는 세상이 온다는 소위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주장을 펼쳤다. 결국 소설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을 왜 했어야하는지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제시해주지 못했다.


다음은 이 소설을 읽고 든 생각.


1. 당시 농촌계몽운동의 성과는 무엇이었을까?

2. 농촌계몽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것은 계급 해방 혹은 독립이었을까?


 



2012년 12월 3일 작성


미학 오디세이 서평


 미학 오디세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논객이자 미학자인 진중권이 쓴 책으로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읽은 1권에서는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의 작품을 통해 미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미학 오디세이는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미학을 재밌고 알기 쉽게 풀어 써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중간 중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라는 위대한 두 철학자의 가상 대화를 삽입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점이 인상적이다. 1권에서는 ‘가상’을 핵심 개념으로 설정하고 예술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서술하고 있다.


 미학 오디세이는 먼저 원시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간은 왜 예술이란 걸 하게 되었을까? 예술의 본래 목적은 감상이 아니었다. 감상을 위한 예술의 전통은 겨우 몇 백 년 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예술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인류 최초의 그림이 그려진 알타미라 동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먼저 ‘유희 기원설’에 따르면, 벽화나 집단무 같은 원시 예술은 ‘남아도는 에너지의 방출 통로’다. 놀 거리가 아무 것도 없었던 원시에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먹고, 자고, 배설하는 등의 본능적인 행위들 외에 특별한 활동 없이 지내던 중,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들은 그림을 그렸던 게 아닐까싶다. 


 여기서 예술은 노동에서 비롯되었다는 다른 가설이 나온다. 예술이 노동을 위한 도구적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노동의 수고를 덜기 위한 노동요, 노동 도구에서 변형된 악기들, 의사소통을 위한 사냥감이 되는 동물이나 농작물 등의 그림들은 모두 그런 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주술적 의미이다. 


동굴 벽화에 대고 창이나 도끼로 가격한다든지 수렵무를 통해 사냥을 재현하는 것은 더 많은 사냥감을 잡게 해달라는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실제 기능은 회화를 통해 동물의 급소를 파악하고 수렵무를 통해 사냥의 절차와 테크네를 반복 학습하는 것이었다. 원시인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예술이 가진 이런 기능을 알고 있었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할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술로 소망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인간은 이제 신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이 위대한 존재의 권능에 매달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종교가 발생했다. 또 다른 부류의 인간들은 비유를 벗겨내고 사물들의 진짜 연관을 알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철학이 생겨난다. 예술은 더 이상 주술이 아니게 되었고, 주술이 ‘가상’으로 여겨지는 순간에 탄생한다. 


이 가상은 현실에 아무런 필요가 없다. 이후 인간들은 이 가상이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사유, 즉 예술과 진리를 연결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가상과 진리의 두 개념을 둘러싸고 대략 두 가지 사유가 있었다.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두 사유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뒤섞이면서, 미학사 속에서 계속 되풀이 된다.


 고대 예술은 이집트에서 시작한다. 이집트인들은 사물을 묘사할 때, 그들이 이미 여러 각도에서 보았던 시각적 정보를 분석하여 그 사물의 본질적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하나의 그림 안에 시각적 종합을 제시했다. 그들에게 예술은 하나의 시각적 추상이었다. 이것은 보편 개념을 외부로 표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가상은 탄생되었다. 이후 예술은 그리스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성장하고 완성되어 로마 시대에 멸망하였다. 


 빙켈만은 그리스 예술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특징지었다. 니체는 여기에 ‘아폴론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그리스에는 명랑한 아폴론 정신의 예술뿐만 아니라 비극이 존재했다. 그리스 예술의 양대 축 중 하나인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이것은 저 깊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광포한 힘이다. 조형예술의 맑고 투명한 정신인 아폴론과, 깊고 어두운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정신 디오니소스. 인류의 모든 예술은 서로 대립하는 이 두 가지 충동으로 말미암아 발전했다. 


아폴론이 개별화로 생긴 세계를 긍정하면, 디오니소스는 개체를 파괴하여 원래의 근원적 존재의 품안으로 되돌린다. 이 땅에 행동하는 개체로 태어난 것부터가 고통의 근원이다. 비극이 주는 지혜는 바로 이 가혹한 삶의 진리다. 이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아폴론의 아름다움으로 감성화한 것, 그게 바로 비극이다. 이렇게 몰락하여 근원적 일자와 다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개체화의 괴로움, 영원한 윤회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해탈에 이르게 된다. 쓰라린 파멸 뒤에 무한한 희열의 세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중세 예술은 가상을 넘어서고자 하였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처럼 예술을 이데아 세계와 감각 세계 다음에 놓지 않고, 오히려 예술은 감각세계와 정신세계 중간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예술은 미메시스가 아니고 영혼의 거울이다. 예술가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내면의 형상에 따라 창작한다. 


또 플로티노스는 예술과 미를 밀접히 관련지어, ‘예술미’란 개념에 도달했다. 그는 진정한 미는 감각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질세계의 재현 대신에 인간의 ‘영혼’과 초월적인 ‘신성함’을 표현하려했던 비잔틴 예술은 그의 정신과 합치된다. 중세 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의 재현을 포기하고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담으려 했다. 


또한 대상에서 해방되어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구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세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형체로 ‘정신’의 계기를 강조하고, 밝은 빛과 화려한 색채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비스런 ‘관조’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중세에서는 예술의 지위가 단순한 가상, 즉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이데아에 가까운 위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세 후기에 이르면 물질세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현실에 많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는 이 세상은 신이 창조한 것이므로 세상 사물 속엔 창조의 질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이 지으신 세계를 묘사하는 건, 곧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철학적 분위기에서 고딕 자연주의가 등장했다. 이렇게 중세 예술은 고딕으로 완성되며 새로운 시대를 기다린다.


 중세의 예술은 감각 세계의 ‘가상’을 포기했지만, 새로운 시대는 ‘가상’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다. 르네상스의 천재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의 목적이 ‘가시적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하였다. 회화가 인식의 기능을 발휘하려면, 자연을 뜯어고치려 해서는 안 되며, 되도록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그에게 창의력이란 ‘재현의 규칙을 발견하는 능력’이었다. 이렇듯 그는 역사상 가장 강한 형태의 모방론을 고수했다. 또한 르네상스 예술은 암흑의 중세를 벗어나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그리스 예술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었다. 


르네상스 이후에는 바로크 예술이 등장했다. 바로크 예술은 주로 전통적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루벤스풍의 윤곽은 뚜렷하지 않고, 묘사는 격정적이며, 구도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그림을 가리킨다. 17세기 고전주의 미학은 르네상스 미학과 큰 차이가 없다. 르네상스가 그들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예술이 데카르트적 ‘이성’의 예술이라면, 바로크는 무엇보다도 ‘감정’의 예술이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알렉산더 바움가르텐은 ‘미학(aesthetica)'이란 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처음으로 인간의 ’감성‘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이전까지 예술은 이성적 작업이었다. 하지만 바움가르텐은 예술이 감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감성을 인식으로 간주함으로써 감정을 복권시켰다. 그의 업적은 예술이 가진 ’인식적 기능‘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것이다. 


 한편 칸트는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대부분을 이야기 했다.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목적은 단순히 즐거워지기 위해서이지, 유식해지려 하거나 잘난 척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칸트 이전 사람들은 진리나 도덕적 교훈을 얻기 위해 예술을 감상했고, 그러한 것을 얻을 수 없는 예술은 타락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미를 ‘유용성’이라고 생각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유용성을 가진 것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 다 빈치에게 예술은 과학이었고, 바움가르텐에게는 감성적 인식이었다. 하지만 칸트는 이 모든 사유를 분쇄한다. 


그에 따르면 미는 사물의 객관적 성질이 아니다. 장미꽃은 나에게는 아름답게 보일 수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보편타당하게 아름다운 사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미에 대한 생각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쓸모 있다고 다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칸트 이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칸트는 이것을 ‘미적 무관심성’이라 표현했다. 칸트는 예술에 절대적 규칙이 있다고 보지 않았고 예술은 천재의 소산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사유에서 ‘낭만주의 미학’이 나오게 된다. 이후 헤겔은 예술을 발전 단계에 따라 분류한다. 그에 따르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물질적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정신적 내용을 표현하는 능력이 커진다. 결국 가상의 부활로 시작된 근대 예술은 그야말로 꽃을 활짝 피웠고, 미학의 개념이 생겨났으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미의 관점이 자리를 잡은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취미론과 미적 범주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며 마친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역시 ‘가상’이다. 현실과 분리되어 가상이 되면서 예술은 탄생했지만, 가상은 그리스 시대에 정점을 찍고 사라졌다. 중세 사람들은 가상을 넘어서고자 노력하였으며, 가상은 현실보다 이데아에 더 가까운 존재라고 여겨졌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며 가상은 다시 부활했고, 그 이후에는 가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책 초반에 제기된 예술과 진리를 연결하는 것에 대한 물음의 답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가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아직 명확한 판단을 못 내리겠다. 겨우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예술에 대해 함부로 말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조금 더 공부를 하면서 생각해보아야할 문제라 본다.


 



내가 읽고 싶은 역사, 철학, 경제 관련 책들



이 중에 읽은 것들도 꽤 있는데

안 읽은 게 대부분이다.


시간이 되면 읽고 싶긴한데


사실 시간 있어도 안 읽게 된다.ㅋㅋ 한 번 읽기가 겁나는 책들이 많아.


저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6 페르낭 브로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최장집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찰스 킨들버거
장기 20세기 조반니 아리기
극단의 시대 에릭 홉스봄
근대세계체제 1~3 월러스틴
자본의 시대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에릭 홉스봄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에릭 홉스봄
증오의 세기 니얼 퍼거슨
시빌라이제이션 니얼 퍼거슨
제국 니얼 퍼거슨
금융의 지배 니얼 퍼거슨
열린사회와 그 적들 칼 포퍼
한국 권력구조의 이해 진영재
한국 근대화 시간의 특성과 미래 임혁백
커피의 역사 하인리히 야콥
스파이스 잭 터너
빵의 역사 하인리히 야콥
기호품의 역사 쉬벨부시
총균쇠 다이아몬드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케네스 포메란츠
커피 설탕 차의 세계사 이윤섭
설탕과 권력 시드니 민츠
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펜더그라스트
유럽의 음식문화 주경철
지중해 5000년의 문명사 노리치
인간과 환경의 문명사 데이비드 아널드
모험과 교류의 문명사 주경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주경철
히스토리아 주경철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주경철
히스토리아 노바 주경철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주경철
네덜란드 주경철
문화로 읽는 세계사 주경철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전체주의의 기원 한나 아렌트
근대 유럽의 형성 16-18세기 주경철
역사란 무엇인가
위대한 퇴보 니얼 퍼거슨
제국주의 박지향
미완의 시대 에릭 홉스봄
경제 강대국 흥망사 주경철
기대감소의 시대 폴 크루그먼
경제학의 진실 폴 크루그먼
새로운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경제학의 향연 폴 크루그먼
거대한 침체 타일러 코웬
폴트라인 라구람 라잔
새로운 부의 탄생 엘 에리언
한국 자본주의 장하성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 최준철
워렌버핏처럼 적정주가 구하는 법 이은원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 폴 크루그먼
대침체의 교훈 리처드 쿠
밸런스시트 불황으로 본 세계 경제 리처드 쿠
글로벌 머니매니저들의 아침회의 드로브니


과연 이걸 내가 다 읽을 수 있을까 싶다.


후우..



그래도 한 2년 잡고 읽으면 되겠지?



특히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꼭 읽어봐야지.


 




Divide and rule(분할하여 통치하라)



제국 건설자는 디바이드 앤 룰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Divide and rule 전략은 2세기 이상 동안 영국 제국 정책의 중요 원칙이었다.


다른 민족 단위들을 분리시키는 것을 유지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티격대격하게 하였고, 

그 생각은 그들의 식민 지배자들을 끌어내리기에 너무 피곤하게 하는 것이었다.

(식민 통치를 당하는 사람들끼리 싸움으로써 식민지배자에 저항할 힘을 잃게된다는 의미)


제국이 확장되면서, 부족 단위는 언어, 종교, 민족성에 근거하여 구분되었고, 

다른 권리들이 주어졌다.


극단적 예는 르완다였는데, 벨기에는 Hutu와 Tutsis를 분리시켰다.

밝은 피부의 투시족은 땅과 특권을, 

반면 후투족은 노동의무를 부여받았다.


벨기에가 물러난 뒤에 민족 분리는 90만명의 투시족 학살을 초래했다.


인도에서는 서로 싸우던 주들과 종교 단위들이 영국에 의해 착취당했다. 


하지만 독립에 이르기까지 몇 달 안에, 

그 분리는 인도아대륙에 결정적으로 힌두 인도와 무슬림 파키스탄으로 분할되는 데에 폭력적 여파를 미쳤다.



분할 통치 전략은 오늘날에도 무수히 많이 사용되는 통치술의 하나이다.

 

 



연도별 세계지도 보는 사이트


연도를 입력하면 그 해에 해당하는 지도를 보여준다. 역사 공부할 때 쏠쏠하게 활용할 수 있다.


http://geacron.com/home-en/



기원전 57년의 세계 지도.


한국은 신라만이 표시되어 있다. 신라의 건국이 그때이기 때문.

고조선은 나오지 않는다.


원 간섭기에는 고려가 사라지고 원나라로 표시된다.

일제강점기 때도 일본으로 나온다.



이 지도를 보면서 느낀 게 우리나라는 정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 지도를 보면 아메리카나 블랙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오세아니아는 국가 표시도 안 되어 있다.

시베리아나 대부분의 유럽도 마찬가지다. 일본도 없다.


그런 곳들은 그때는 사람이 살지 않았거나 부족사회 정도만 있었기 때문에 나라는 없었다.


소위 세계 4대 문명을 중심으로 인류 역사는 발전해 나갔다.

유럽은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지배했다.


우리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써서 지금까지 이어 내려왔다.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암튼 이 지도는 공부할 때 참고하면 아주 유용할 것 같다.


 



주경철 교수의 저서 목록, 번역서 포함










'음식의 역사'를 주제로 한 책들



22,500원 가격비교
2015.07.19



11,700원 가격비교
2015.07.24


동경대 본고사 논술 문제, 일본 대학 입시


이 문제들을 풀려면 정말 많이 공부해야될 것 같다.


 


2015/08/13 - [역사] -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교 본고사 논술 문제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교 본고사 논술 문제


이게 진짜 히토츠바시 대학 본고사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엄청 어렵긴 어렵네.


1문은 하나도 모르겠고.

2문은 18세기 중반에 발생한 세계적 규모의 분쟁이라고 하면 7년 전쟁(포메라니아 전쟁)밖에 없음.

3문은 A-1은 보호무역화 되었다는 것일듯 하고, A-2는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따른 자치권 획득? A-3은 잘 모르겠다.

B는 키워드로 힌트 다 준 문제라 대충 풀면 됨.


근데 이거 역사학과 논술문제인가? 왜 다 역사 문제밖에 없지..ㅋㅋ


*나중에 답도 찾아서 올려봄.

1문은 전혀 모르는 내용이고, 2문은 예상대로 7년 전쟁이다.

3문은 A-1은 예상대로인데 A-2와 A-3은 틀렸다. 모르는 내용이네.

B는 쉬우니 패스


 


2015/08/13 - [역사]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 한국 목록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 한국 목록




우리 역사에 남을 유산임과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이 선정되었다.


이런 유산 투어 같은 것도 관광상품으로 만들면 좋을 듯 하다.


어쩌면 이미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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