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일 작성


『상록수』서평



 소설 『상록수』는 1935년 작가 심훈이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어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어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30년대에 농촌 계몽 운동을 펼쳤던 인텔리들의 사랑과 시련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한 신문사에서 주최한 농촌 운동가 보고 행사에 참여한 박동혁은 그곳에서 채영신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뜻이 맞아 급격히 친해지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까지 발전한다. 


이후 둘은 도시를 떠나 박동혁은 고향 한곡리로, 채영신은 자신이 활동하던 청석골로 돌아가서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친다. 각자의 지역에서 일하면서도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간다. 한곡리에서 동혁은 마을 청년들을 잘 이끌어서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마을 회관을 짓는다. 이는 어려운 농촌 상황에서 대단한 성과였다. 덕분에 박동혁과 청년들은 자신들이 흘린 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한편 영신은 좁은 교회당 건물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비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아이들이 몰리자 새로운 야학당을 건축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받는다. 기부금을 받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은 야학당 건축에 성공한다. 그러나 영신은 그 과정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일한 것이 화근이 되어 맹장염과 장중첩증으로 쓰러져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그 소식을 들은 박동혁은 부리나케 달려와 영신을 간호하고 서로의 미래에 대해 굳건한 약속을 한다. 


그러던 중 한곡리에서는 고리대금업자 강기천이 온 마을 사람들을 휘어잡고 농우회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박동혁은 바로 한곡리로 돌아온다. 동혁의 친구 건배를 비롯한 많은 마을 사람들이 이미 강기천의 편으로 돌아선 상황에서 동혁은 강기천과 담판을 지으러 간다. 동혁은 강기천에게 마을 사람들이 강기천에게 진 빚을 갚되 법으로 정해진 이자 이상은 받지 말라고 하였다. 동혁을 무서워하던 강기천은 그 제안을 수락하고 마을 사람들의 빚은 탕감 되었다. 그 뒤로 회원들은 물론 마을의 인심은 동혁에게로 쏠렸다.  


 그 뒤 영신은 일본의 기독교 학교로 유학을 결심하고 한곡리에서는 농우회 회장 선거가 열린다. 회장 선거에서 강기천이 박동혁을 제치고 회장으로 당선되자 동혁을 따르던 청년들은 크게 반발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강기천의 횡포에 분노한 동혁의 동생 동화는 마을회관을 불태워버리려 했고, 동혁이 그것을 발견하고 제지하려 하다가 공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영신은 동혁을 면회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조선과 다른 문화에 적응하지 못 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각기병에 걸려 조기 귀국길에 오른다. 그리고 청석골의 하숙방에서 영신은 죽음을 맞이한다. 감옥에서 나와 장례식에 참석한 동혁은 영신의 유지를 받들어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할 것을 다짐하며 다시 한곡리로 향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30년대 초반은 1920년대의 문화통치기에서 식민지 안정화 정책기로 넘어온 시기였다. 1920년대 일제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임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곡가 정책이 필수였고 저곡가 정책을 시행하려면 쌀 생산량이 많아야 했다. 


따라서 일제는 쌀 공급량을 늘리기 위해 조선을 쌀 생산기지화 하여 일본으로 쌀을 빼갔다. ‘산미증식계획’이 바로 이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농지 개량, 경지 정리, 수리시설 정비, 화학 비료 사용, 품종 개량, 농기구 개량 등 농업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정책이 펼쳐졌다. 실제로 농업 생산성은 증가하여 생산량은 이전보다 1.5배가량 증가하였다. 


그러나 생산의 증가가 농가 소득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노동 투입량이 증가하고, 수리 조합비 부담이 커지고 비료도 구매해야 하는 등 자본을 더 많이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빚을 지는 농민들이 늘어났고 그 결과 자·소작농이 몰락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도래하며 일제와 조선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조선에서는 농업 공황이 터지며 농촌의 양극화는 심해졌다. 


이렇게 되자 계급 해방과 일제 타도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구의 약 80% 이상이 농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일제 입장에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농촌 사회의 위기는 식민 지배체제에도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2년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하여 당시 농촌경제의 몰락에 따른 소작농 및 농민들의 사회불안 억제와 소작농, 농민들의 불만 및 각종 소작쟁의 운동 활성화를 통제하는 한편, 본격적인 중국대륙 침략전쟁을 앞두고 '황국신민화'정책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고자 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종교계와 언론계를 중심으로 한 개량주의적 농촌계몽운동도 일제로서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1932년 7월부터 농촌사회의 제어를 통제하기 위한 식민지 지배체제의 안정을 목표로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했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농업정책이 없어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후 농가 경제 갱생 계획을 실시하여 읍면 단위로 30~40호의 갱생 부락을 지정하고 개별 농가까지 관리대상에 편입시켜 총독부의 감시 시선이 마을, 개별 농가 단위까지 침투하게 된다. 그러는 한편 일제는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 완충지대로 ‘농촌 중견인물’을 육성한다. 이들은 농민 출신으로 농민과 지주 간의 이해를 조정하는 식민지배 파트너로 삼았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농가 경제 갱생을 내세웠지만 결국 농민들을 통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1934년에는 조선 농지령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지주의 권리제약과 소작인의 권리강화라는 방향에서의 입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작농 보호입법이라기보다 일본 독점자본의 농촌사회에 대한 직접적 통제의 강화책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내용은 소설에서도 간략하게 나온다.


「농지령(農地令)이라는 것이 발포되었대야 결국은 지주들의 맘대로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니까, 어떻게 강도사 집뿐 아니라 다른 지주들까지도 한 십 개년 동안만 도지로 논을 내놓게 만들었으면, 힘껏 개량식으로 농사를 지어 그 수입으로 땅 마지기씩이나 장만을 하게 될 텐데…… 하고 꿍꿍이셈을 치고 있는 중이다.」


 결국 1930년대의 어려웠던 농민들의 생활과 그에 따른 불만을 통제하기 위해 일제는 온갖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도 농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만큼 1930년대의 농촌은 위기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브나로드 운동(농촌계몽운동)이 전개된다.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초에 일어났던 한국의 학생 운동으로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이다. 1929년부터 이미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 운동을 전개해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1931년 동아일보사의 주도로 농촌의 문맹자들을 가르치는 농촌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상록수의 작가인 심훈과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 등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을 비롯한 대학생과 대졸 출신 인재들이 각지의 농촌으로 가서 봉사, 계몽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은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의 정신을 이어 받아 '갱생의 광명은 농촌으로부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마라!'라는 신념으로 사람들을 가르친다. 계몽운동 세력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된 것은 일제보다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조선인들의 실력을 양성하여 일제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인 현실에서 농촌을 계몽하지 않고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계몽운동과 『상록수』같은 농촌계몽소설은 여러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소설에도 나와 있다시피 이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제가 영신에게 예배당에 너무 많은 인원을 들이지 말라고 통제하는데 여기서 영신의 해법은 그저 그들의 말에 순응하고 앞으로 더 큰 야학당을 짓겠다는 것뿐이었다.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소설 전반에 일제의 잔혹한 통치 같은 것은 느낄 수 없고 그저 농촌 계몽가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소설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실력을 양성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와 닿지가 않는다. 실력을 양성하여 돈을 모아 군대를 창설하여 게릴라 작전을 펼친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실력 양성’에 대한 말만 하고 있다. 영신과 동혁이 왜 그토록 농촌 계몽 운동에 매달리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이 당시 농촌계몽운동가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 나오는 백현경은 당시 돈으로 삼천 원을 들인 호화주택에 사는 여자로 계몽운동을 마치 취미생활 정도로 여긴다. 이들에게 농촌계몽운동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무지 몽매한 농민들을 가르치는데서 오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발표된 1935년은 이미 식민통치가 시작된 지 25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조선 사회 전반에 독립에 대해 체념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대부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사회의 지배층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동경 유학을 선망하였다. 농촌계몽운동 또한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력을 양성하여 일제에 저항한다는 것은 그저 허울뿐인 말이고, 단순한 교육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농민과 농촌을 파괴하고 있는 원인을 외세의 침탈과 봉건 유제라는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서 찾지 않고 농민의 무식과 나태라는 개인적 조건에서 찾았다. 또한 농민 개개인이 열심히 배우고 일해서 생활을 개선해 나갈 때 비로소 민족 해방도 성취되고 농민도 잘 사는 세상이 온다는 소위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주장을 펼쳤다. 결국 소설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을 왜 했어야하는지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제시해주지 못했다.


다음은 이 소설을 읽고 든 생각.


1. 당시 농촌계몽운동의 성과는 무엇이었을까?

2. 농촌계몽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것은 계급 해방 혹은 독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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