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혁명 - 부르주아지의 권력 쟁취기


 유럽의 근대는 시민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당시의 시민이란 부르주아지를 의미한다. 현대적 의미의 시민은 이 부르주아지들과 민중들의 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 대륙의 귀족들은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을 천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양반들은 상업 활동을 천박한 것으로 인식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체계를 따라 상인 계급을 낮게 보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인식이었다.(예외적으로 영국 귀족은 돈을 좋아했다고 한다.) 게으른 귀족들 덕분에 신분이 낮은 평민들은 상업 활동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상인의 자제들은 생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어서 대학 등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실용적인 학문들을 배우며 국가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철학같은 인문학을 공부하며 머리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실력을 차곡차곡 쌓은 상인 계급은 부르주아지로 불리게 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부르주아지의 등장이 절대왕정 체제와 시민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부르주아지들의 투쟁을 통해 어떻게 유럽의 역사가 바뀌어 나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절대왕정 체제는 왜 생겨났을까? 거시적으로 봤을 때 세 가지의 배경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경제적 이유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유럽은 낮은 농업생산성으로 경제성장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아이를 많이 낳아도 그 아이들을 먹일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고, 흉년이라도 드는 경우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전염병까지 같이 도는 상황이 발생하면 농업 활동이 마비되고, 일꾼들이 사라지며, 파종과 수확이 어려워지고, 결국 땅이 버려진다. 주기적인 기근은 전반적인 경제 불안을 가중시키는 것은 물론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그리고 인구 증가와 신대륙에서 은이 유입되며 가격 혁명이 일어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두 번째는 전쟁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 전쟁,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쟁 등으로 전쟁이 상시화 되며 군대 규모가 커지게 된다. 중세 까지는 각 지방의 영주 중심의 소규모 군대가 전쟁의 중심이었지만 근대로 넘어오며 군대가 국가 단위로 커지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는데 바로 현대적 화기로 경무장한 군인들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중무장 기사와 달리 급료를 받는 상비군의 형태이다. 화기의 발전으로 중무장 기사들을 대체한 이들은 왕에게 충성하는 군대로, 귀족은 이제 왕에게 의존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 왕은 충분한 상비군을 통해 확고한 조세 수입원을 확보하고 조세 수입을 통해 충분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였다. 


 세 번째는 사회의 변화이다. 인플레이션과 전비 증가로 인해 세금이 인상되자 백성들은 고통에 빠진다. 또한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 과학 혁명으로 인한 세계관의 혼란과 정신적 위기를 겪게 된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은 정신적 혼란의 양상으로서 사적인 권력 행사가 공적인 국가 권력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국가의 신성한 권위와 국왕이 지닌 절대적인 권력의 정당성이 확인되었다. 


 핵심적인 것은 왕의 권력이 강해지고 귀족의 권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절대왕정 체제로 가기에는 부족했다. 왕은 자신을 받쳐줄 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부르주아지들이다. 왕 자신을 정점으로 귀족과 부르주아지 두 세력을 거느리는 전략을 취한다. 중세 시대에는 이름만 왕이고 실질적으로 지방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했다. 


그만큼 귀족들의 힘이 강력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왕은 귀족의 힘을 누를 반대 세력이 필요했고, 부르주아지는 돈과 함께 권력을 잡고 싶어 했다.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왕에게 세금을 바치며 충성했고, 왕은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 시기 세금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국세청같은 조직이 필요하다. 그래서 관료제가 시행되고 부르주아지들이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또한 왕은 국가 재정 부족으로 관직을 부르주아지들에게 판매한다. 부르주아지들은 관직을 매수함으로써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고 사유재산이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절대왕정의 특징으로 중상주의가 있다. 중금주의라고도 불리우는데 이것은 화폐가 많은 나라가 강대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입을 최소화하고 수입을 최대화하는 보호무역주의를 펼치고, 여기서도 부르주아지들이 활약을 하며 무역을 책임진다. 그리고 상업, 통상의 증가로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절대왕정 체제를 더 공고히 했다.

 

 부르주아지들은 상업 활동으로 부를 얻었고, 관직에 진출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사회와 문화도 그들의 후원으로 다양한 책과 예술작품 등이 나왔다. 결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서 부르주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왕이 왕권신수설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부르주아지들은 뒤에서 비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실질적으로 나라를 움직이는 건 왕도 귀족도 아닌 부르주아지들이었다.


 절대주의는 군사적인 우월 의지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진 대외전쟁은 국왕으로 하여금 예외적인 자금 조달 방법을 선택하게 했고, 전쟁과 그것이 수반하는 사회적 긴장이야말로 절대 왕정의 필수 조건이었기에 예외적인 방법은 반영구적 체제로 고착되는 경향이 짙었다. 


절대 군주의 권력이 절정에 달할수록, 그것이 지닌 예외적인 상황 또한 극에 달하는 셈이었다. 이것은 마치 담배가 몸에 안 좋다는 것을 알지만 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전쟁 수행을 위해 끊임없는 재정 압박에 힘겨워 한 왕이 정말로 절대적이었는지 의문스럽다.  


 왕은 자신의 절대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을 대립시켜서 그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은 귀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부르주아지 세력의 힘을 키워주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목을 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은 자신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암세포가 전이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고, 부르주아지들은 야금야금 자신들의 힘을 키워나갔다.


 때가 무르익었다. 왕은 아직도 자신이 절대 군주라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커질 대로 커진 부르주아지들은 왕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구조적인 사회경제적 모순이 주기적인 경기 변동이나 전쟁이라는 예외적인 상황과 결합되었을 때, 정부가 지나친 증세를 요구하게 되면 정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다. 증세는 그 자체도 문제지만, 조세를 어떻게 부담시킬 것인가의 문제 때문에 잠재적인 사회 갈등을 격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여기서 부르주아지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가 통제하는 입헌 군주제 정부 수립’이라는 기치 아래 민중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든다. 


미사일의 발사 스위치를 누른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유명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 세력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바스티유를 함락했고 구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부르주아지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자신들이 특권 계급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자신들이 거리에서 피 흘리며 혁명을 지켜냈다고 생각한 민중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후 온건파와 급진파가 대립하고 타국과 전쟁을 벌이는 등 혼란이 계속됐지만 결국 민중은 혁명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보유한 군대에 의지한다. 혁명전쟁 과정에서 급격히 영향력을 확대한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유능한 장군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말은 바로 나폴레옹 군사 독재였다. 민중에 의한 혁명은 군사독재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았다.


 시민 혁명은 분명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봉건제가 폐지되고 신분의 구별도 사라졌다. 구체제 하에서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이 누리던 특권도 사라졌다. 혁명을 통해 국가는 국민 주권이라는 새로운 원칙에 입각해 재조직되었다. 시민들은 신체의 자유와 권리에 있어서 평등해졌고, 시민 혁명의 논리적 귀결은 공화국의 수립이었다. 


하지만 이 공화국은 모든 시민이 기본권으로서 시민적 권리를 누리지만, 정치적 권리는 시민들 가운데서 재산 자격을 갖춘 일부 ‘정치적 국민’의 몫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피의 신분제’를 ‘돈의 신분제’로 바꾼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부르주아지들은 철저히 민중을 이용해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혁명 이후 왕은 더 이상 예전의 왕이 아니었으며,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적 계급은 사라졌다. 그리고 민중은 제도적으로 다스렸다. 이제 본격적인 부르주아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근본적으로 귀족이나 부르주아지나 소수 특권 계층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귀족은 피로 정해지는 신분이고, 부르주아지는 돈으로 정해지는 신분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귀족에서 부르주아지로 권력이 이양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근대 유럽의 역사는 부르주아지의 권력 쟁취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절대왕정 체제는 왕과 그들의 이해관계 일치로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들의 성장이 결국 왕을 쓰러뜨리고 구체제를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볼 때 절대왕정 체제는 시민혁명의 원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절대왕정 체제와 시민혁명을 거쳐서 부르주아지들은 마침내 돈과 권력을 모두 차지하며 근대 유럽사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2012년 11월 2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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