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6일 작성


『공리주의』서평



  『공리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저술한 책으로 그는 머리말에서 수천 년 간 옳고 그름에 관한 기준을 수많은 사람들이 논의 했으나 명확한 제 1의 도덕원리가 나오진 않고 그 입장에 학파만 갈렸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중 하나인 칸트는 그의 책 『도덕형이상학』에서 도덕적 의무의 기원과 근거가 되는 보편적 제 1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행위 규범이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들에게 하나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행동하라.” 


그러나 그는 이 법칙에서 어떤 실제적인 도덕적 의무를 연역해내려고 하는 순간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하고 만다. 왜냐하면 정말 이상하게도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들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도덕적인 행동 규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심각한 모순이거나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밀은 칸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들이 보편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나서 얻은 결과가 이러이러하므로 그 누구도 감히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이런 한계가 있는 이론을 넘어 공리주의를 주창한다. 


  먼저 밀은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공리주의의 명확한 정의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공리주의는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다.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것의 정의이다. 여기서 행복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행복과는 좀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쾌락의 결핍, 그리고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들어있는 쾌락 때문에 또는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을 늘려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가 된다. 


이 이론은 인생을 너무 쾌락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짐승이 느끼는 쾌락과 인간이 느끼는 쾌락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다. 바로 이것이 질적 공리주의의 출발점이다. 쾌락의 질을 따진다고 해서 공리주의 원리에 손상이 가지는 않는다. 어떤 두 가지 쾌락이 있다고 할 때,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 같은 것과 관계없이 그 중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쾌락에 대해 똑같이 잘 알고, 그 둘을 똑같이 즐기고 음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보다 높은 능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특정 삶의 방식을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가지고 있다. 이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결코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결국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더 나은 것이다. 


밀에 따르면 바보나 돼지가 이런 주장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한쪽 문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비교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들은 두 측면 모두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러한 점이 쾌락에는 질적 차이가 없다고 바라본 벤담의 생각과는 명확히 다르다.


  한편 밀은 이러한 행복이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만의 최대 행복이 아닌 사회 전체의 행복을 생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대 행복 원리’를 따를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든, 가능한 한 고통이 없고 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상태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된다. 밀에 따르면 이 상태는 인간 행동을 위한 규칙과 지침이라 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따르게 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행복이 인간 삶과 행동의 합리적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은 행복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반박했다. 여기에 밀은 효용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불행을 방지하거나 완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 상태는 지속 불가능하며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행복을 고통은 일시적인 것 외에는 별로 없는데 쾌락은 다양하게 많은 순간을 행복이라고 부른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이런 수준의 행복은 정상적이고 올바른 교육과 사회제도만 갖춰진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공리주의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 세상 또는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성에 입각해서 살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영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公利와 功利에 대한 혼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선한 행동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 개인들의 이익이 모여 사회의 이익이 형성된다. 밀은 이밖에도 공리주의에 관련된 다양한 오해들에 대해 반박을 한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의 효용 원리를 따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효용 원리는 다른 모든 도덕 체계가 행사하는 윤리적 제재를 전부 가동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외부적 제재와 내부적 제재가 있다. 외부적 제재는 두려움, 동정심, 호감, 경외심 등인데 남들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다른 사람이 행하는 행동을 보고 느끼는 감정, 단편적으로 들어나는 일반적인 느낌이다. 


반면 내부적 제재는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하나의 느낌을 말하는 것으로 의무를 위반하게 되면 강하든 약하든 일종의 고통이 수반된다.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정도가 심하면 단순한 감정을 넘어 극심한 고통으로까지 발전한다. 밀은 이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인 도덕적인 자연 감정에 기반 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연적 감정의 기초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감정이 있다. 이것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인데, 이것은 이미 인간 본성 속에서 강려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다행스럽게도 굳이 인위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에 비례해 점점 강해진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공리주의의 효용 원리가 잘 작동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밀은 정의와 효용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철학이 시작된 이래, 효용이나 행복이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이론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를 제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의justice에 관한 생각이다. ‘정의’라는 용어의 어원은 심판 혹은 법의 집행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이것이 효용이나 행복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정의라는 말은 행동 규칙과 그 규칙에 강제력을 불어넣어주는 감정, 이 둘을 상정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 것은 규칙을 위배하는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나의 정의감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 자신 또는 그 사람이 동정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나 손해를 물리치거나 보복하고자 하는 동물적 요구와 같다. 바로 이 감정으로부터 그 느낌이 도덕성을 갖추게 된다. 


또한 정의라는 것은, 인간 삶을 이끄는 어떤 규칙보다 더 진지하게 인간의 참된 복리에 대해 염려하고 따라서 어느 것보다도 더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 도덕적 규칙을 지칭한다. 우리가 정의라는 개념의 본질적 요소라고 규정한 것, 모든 사람이 권리를 지닌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보다 강한 구속력을 암시하며 정당화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영향력을 지니며 어느 누구도 남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잘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을 사회가 똑같이 잘 대우해야 한다. 밀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수준, 분배 정의에 관한 최고 수준의 추상적 수준이다. 


  그는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불평등은 불의로 규정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가 짓밟히는 상황과 불평등에 대해 무관심 했다. 하지만 밀은 사회 진보의 전 역사는 수정과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라는 개념이 사회 전체 차원에서 사회적 효용이 아주 높기 때문에 불평등한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고할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다. 


자연적으로 도덕적 감정을 느끼며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 혼자 잘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보다, 함께 더불어 잘 살기 위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정의라는 용어에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인 행복, 효용이 깊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들은 절대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 


  이상이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주장이다.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중요시하며 그 행복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밀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개인의 이익'이다. 왜냐하면 공리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 하면 집단과 국가의 이익은 저절로 증가한다.'이기 때문이다. 특히 밀은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시하여 『자유론』이라는 책을 썼고, 그 책에서 개인의 자유는 국가를 대상으로 테러를 하거나 공익에 반대되는 행위가 아니라면, 어떠한 이유에서도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렇다면 왜 밀은 ‘개인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밀이 살던 당시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던 시기였다. 또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전 세계에 걸쳐 광활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처럼 해가지지 않는 대영 제국은 나날이 번창했지만 소수 자본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 국민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삶은 각박했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노동현장으로 내몰렸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밀로 하여금 자유와 공리주의 철학을 주장하게 만든 것이다. 


  한편 밀은 사회적 이익의 증대를 위한 정부의 개입과 더불어 개인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 분배에 관한 사회적 제도의 수립까지도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공리주의는 효용의 증진을 위한 경제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면서도 효용이 어느 일방으로 흐르지 않는 평등한 세계관을 주장한다. 이처럼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더욱 정교한 이론으로 발전시켜서 명확하고 보편적인 ‘제 1의 도덕원리’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밀의 공리주의 이론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개인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익까지 고려해야 하는 덕에 개인의 소외를 불러온다거나 특정한 소수의 이익을 저버릴 수 있다는 한계로 인해 비판 받았다. 또한 가장 결정적인 이론적 결함은 인간이 도덕적인 자연 감정인 사회성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경험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밀은 그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만 주장할 뿐, 실제로 그가 경험과 관찰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아니다. 


제 1의 도덕원리라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그의 생각과 배치되는 모습이 상당히 나타난다. 결국 밀의 기대와 달리 공리주의가 우리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기준을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성찰했던 그의 노력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살았던 시대처럼 현재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미 4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휘몰아쳤었다. 정의에 관한 이 책에서도 공리주의가 앞 장에 소개되며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을 한다. 그리고 이 열풍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 복지 담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14년에는 ‘정의’라는 다소 추상적 주제보다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부의 불평등’문제에 대해 전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저작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내용에서 촉발되었다. 피케티의 연구에 의하면 자본주의 역사 300년간 자본수익률은 항상 경제성장률을 앞서기 때문에 자본가는 근로자보다 더 많은 소득을 취할 수 있고, 더구나 자유로운 부의 세습으로 인해 자본가와 근로자, 부자와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의 소득 불평등은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공리주의는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행복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긴 인본주의적 사상이다. 지금 같은 시장 만능주의에 빠진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그의 사상을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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